2007.4 |
[전라도 푸진사투리] ‘양손에 행주 들고 방그작작 웃는 양은 아리금살 꾀꼴네라’
관리자(2007-04-13 18:21:24)
[전라도 푸진사투리] ‘양손에 행주 들고 방그작작 웃는 양은 아리금살 꾀꼴네라’
글 | 김규남 『언어문화연구소장』
시조에는 음보가 있고 가락이 있다. 그런데 시조 음보의 진행이 이른바 ‘뽕짝’ 리듬하고 닮은 것 같다. 처음 두 행은 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다가 마지막 행에 살짝 파격을 주는 시조의 리듬을 서둘러 몰아치면 마치 ‘쿵짝 쿵짝 쿵따리짝짝’ 아니면 ‘뽕짝 뽕짝 뽕지리뽕짝’ 등의 리듬과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즉 처음 두 행은 같은 음보를 반복해서 리듬을 만들고 세 번째에 비틀어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보면, 시조의 ‘삼사삼사 삼사삼사 삼오사삼’이나 유행가의 ‘뽕짝 뽕짝 뽕지리뽕짝’은 단순한 리듬의 반복으로 시작하여 약간의 파격으로 정리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요지경 / 요지경 속이다 /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아안다.
야야야이 야들아 / 내말조옴 들어라 /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 짜가가 판친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을 만큼 자유로운 순간에 ‘뽕짝뽕짝’이나 ‘쿵짝쿵짝’의 리듬이 우리를 흥겹게 하고 시조의 ‘삼사삼사’가 우리 시문학사에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그렇건 영혼의 소리가 그렇건 우리말의 이치가 그렇건 간에 전라도 방언 속에도 이런 방식의 말하기가 존재하며 그것이 주는 재미 역시 시조 표현 양식의 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옛날에 똑같은 친구가 있었던 개비여.
하나는 눈깜짹이, 하나는 코훌쩍이, 하나는 부실먹쟁이
(부안군 동진면)
눈을 자주 껌벅거리는 습관이 있는 사람, 코를 자주 훌쩍이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누가 먼저 이건 상관없다. 이 두 사람의 반복적 행위에 대한 상상과 그 두 사람을 같은 위치로 배치한 것으로부터 일정한 리듬이 생긴다. 그런데 마지막의 ‘부실먹쟁이’는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는 모양이니 앞의 두 사람과는 그 성격도 다르거니와 글자 수도 달라서 명백한 파격을 이룬다. 그리고 그 방식은 시조나 뽕짝의 마무리와 같다.
앞집 지순 어매, 옆집 깨순 어매, 뒷집 순뎅이 아무거
모다 와서 콩나물을 지르네 험서 난리를 치는디
(부안군 줄포면)
‘앞집, 지순어매 / 옆집 깨순어매 / 뒷집 순뎅이아무거’ 역시 마지막의 ‘순뎅이 아무거’의 파격이 앞의 두 번 반복되는 의미와 리듬과 대조를 이룬다. ‘지순 엄마, 깨순 엄마’는 의미와 리듬이 완전히 동일하지만 ‘순뎅이 아무 거’에서는 ‘순뎅이’의 고모든 이모든 아니면 할머니든 아주머니든 그 자리를 차지할 사람의 개연성을 대폭 확대하여 그 다음 말 ‘모두다 와서 난리를 치는’ 장면에 등장할 인물의 폭과 수를 매우 적절하게 개방해 놓고 있다.
도채비들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야단이 나
도채비들이 깜박거림서
왔다갔다 허고 달음박질 허고 야단이 나 (부안군 줄포면)
도깨비의 행위에 대한 묘사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왔다갔다, 왔다갔다’로 반복한 후에 ‘야단이 나’로 마무리 되며, ‘왔다갔다 허고, 달음박질 허고’로 반복되다가 ‘야단이 나’로 다시 마무리되는 형식성 역시 앞서의 정형성과 같은 맥락이며 시조 종장의 마무리 방식이다.
이러한 정형성의 실패와 성공은 역시 마무리의 적절성이다. 즉 단순하게 반복된 내용이 얼마나 실감나고 적절하게 마무리되느냐가 이러한 표현 방식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세 예시에서 ‘부실먹쟁이, 순뎅이 아무거, 야단이 나’가 모두 마무리의 적절성을 보여주지만 그 효과로 보면 ‘순뎅이 아무거, 부실먹쟁이, 야단이 나’의 순서로 표현 효과의 적절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야단이 나’는 단순한 정리인데 비해 ‘순뎅이 아무거’는 다음 상황을 미리 감안하여, 여러 사람을 나열해서 수많은 동네 사람들 그래서 딱히 누군가를 지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부실먹쟁이’의 대조나 파격 역시 ‘야단이 나’보다는 한 수 위다.
뜬금없는 말 ‘요리조리 요리조리 망금당실 떠’를 보라. ‘요리조리, 요리조리’와 ‘망금당실 떠’의 전후 맥락을 고려해 보면 무엇인가가 물 위에 떠서 좌우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요리조리 요리조리’ 속에는 마치 노를 젓는 대로 배가 좌우로 움직여 가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연상되는데 도대체 ‘망금당실’은 무엇인가. 우리의 직관으로 ‘두리둥실’ ‘두둥실’ 정도로 표현됨 직한 상황에 ‘망금당실’이라니. 그런데 ‘망금당실’은 ‘두리둥실, 두둥실’ 못지않은 유연하고 안정된 모습을 상상하고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달이, 풍선이, 배가’ 가볍게 떠오르거나 떠 있는 모습을 이미지화해 놓은 단어 ‘둥둥’이 그 나머지 ‘둥실, 두둥실, 두리둥실’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 반면 ‘망금당실’은 우리에게 낯설다. ‘둥둥’계열의 단어 이미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하다. 아무런 거부감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둥둥’ 계열의 단어가 가지는 가벼움을 극복하여 더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떠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망금당실’의 가치가 돋보인다.
‘망금당실’의 효과처럼 ‘양손에 행주들고, 방그작작 웃는양은, 아리금살 꾀꼴네라’의 표현 효과는 ‘꿍짝꿍짝 꿍짜자작 작작, 삼사삼사 삼오사삼’ 방식의 정점에 와 있는 것 같다. 양손에 행주를 들고 있으니 팔 걷어 부치고 열심히 일을 하던 일상의 건강함이 그에서 우러나고, 그런 그가 꽃망울 터지듯 수줍고 탐스럽게 웃는 모양이 ‘아리금살’ ‘꾀꼴네’라니. 아망스럽고 귀엽고 탐스럽고 건강한 젊은 아낙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사용된 ‘아리금살’과 ‘꾀꼴네’. 그런데 ‘아리금살’이 어쩐지 ‘아리땁다, 금빛, 살갑다’는 단어들의 첫 부분으로 조합된 것 같고 그래서 그런지 그 이미지들이 모두 그 단어 속에 섞여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모양은 ‘앙증맞은’ 금빛 새 ‘꾀꼬리’로 응축되고 ‘꾀꼬리’의 소리 이미지를 바탕에 깐 채로 외형적 특성들마저 그 아낙의 싱싱한 미소를 농축하게 만들고 있다.
말이 가락이고 가락이 말이었던 시절, 슬프고 힘들어도 노래요 즐겁고 행복해도 노래인 시절이 있었다. 숫자를 셀 때도 ‘한나, 두울, 세엣, 네엣’, 사람을 셀 때도 ‘한놈 두지기, 석삼 너구리······’. 말과 삶이 건조해질수록, 가락 있는 말과 삶이 고파온다. 물론 믿을 수 없는 놈들의 말이야 오히려 가락을 싣는 게 더 야비한 일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