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 |
[서평] 대화
관리자(2007-04-13 18:14:48)
[서평] 대화 - 인간다운 삶의 길잡이 글 | 이덕자 『전북학교급식연대 상임대표』
“화해와 용서 그리고 깊은 지혜의 울림을 삶의 여백에 담다.”
책 『대화』는 속표지에 이런 문구를 담아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화해, 용서, 지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목들이다.
박완서, 이해인, 방혜자, 이인호, 이 네 분은 한국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지성들이다. 그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진작부터 책이나 매스컴을 통해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는 분들이며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친근함을 느끼고 있는 분들이다.
이 책은 ‘슬픔으로 씻기고 사랑으로 비우다’라는 제목으로 박완서 소설가와 이해인 수녀가 나눈 대담을 전반부에 싣고, ‘시대의 거울 속에 영원의 빛을 담다’라는 제목으로 방혜자 화가와 이인호 역사학자의 대담을 후반부에 실었다. 책의 내용이 딱딱한 이론이나 토론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일상에서 했던 생각들을 편안하게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 읽는 이도 함께 대화를 나누는 듯 편안해짐을 느낀다.
슬픔으로 씻기고, 사랑으로 비우다
박완서와 이해인은 서로 인연을 맺은 지 20년 가까이 된다. 80년대 후반 이해인 수녀가 천주교의 주보에 실을 글을 박완서 소설가에게 청탁하면서 직접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박완서의 부군이 아주 위독하여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해인 수녀의 청탁에 거절하지 못하고 원고를 써준 데서부터 둘의 인연이 각별하게 되었다.
88올림픽의 열기로 온 세상이 환호성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박완서는 남편을 병으로 잃고, 얼마 되지 않아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그 당시에 한국인이라면 모두 함께 슬퍼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책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의 소설뿐만 아니라 그의 삶 자체만으로도 국민 모두에게 배움의 거울이 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박완서가 슬픔에 빠져 두 달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을 때, 이해인 수녀는 부산에 있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녀원으로 그를 초대했다. 그는 거기서 열흘 정도 지내면서 차츰 밥도 먹고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이런 인연의 향기를 지니고 있는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슬픔, 신앙, 문학, 우리, 사랑, 기도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같은 신앙인이라서 그런지 살아가는 방법에도 공통점이 많았다.
희망과 용기는 깊은 슬픔을 넘어섰을 때 얻어지는 것이며 사랑이란 가만히 지켜봐주고 기다려주는 것이라는 이해인의 생각에 박완서 역시 기다려주는 것도 결국은 슬픔을 나누는 한 방식이라며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견디며 사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들은 사랑이란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신앙은 큰 우물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퍼 올려도 늘 그만치의 깊이로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종교가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정치 불안과 경제문제를 걱정하면서 급변하는 사회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하며 욕심을 버리고,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며 나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소리를 모은다.
시대의 거울 속에 영원의 빛을 담다
방혜자 화가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후 1961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다. 이인호 역사학자는 서울대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러시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핀란드와 러시아 대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로 이름나 있다.
서로의 이름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던 이들이 직접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2년 이인호가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으로 있을 때, 방혜자가 윤경렬 선생의 『겨레의 땅 부처의 땅』을 불어판으로 펴내는 일 때문이었다.
이들이 나눈 이야기는 꿈, 역사, 예술, 여성, 남성, 교육, 가치관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깨어있던 부모의 덕택으로 유학길이 어려운 당시에도 그들은 꿈을 좇아 날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일제시대, 해방, 6?25 전쟁, 4?19혁명 등 급변하는 사회상황 속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키워나갔다. 방혜자는 역경을 겪으면서 빛에 대한 이끌림으로 <빛의 연작>을 그렸다. 이인호는 대학교 2학년 때 소련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것을 보고 러시아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조기교육에 대해 역사관이나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긍심을 길러주고 난 다음에 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위력을 여러 번 체험한 세대로서 젊은이들이 역사의식을 잃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직 우리나라가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여성인력 활용에서 세계의 추세에 뒤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기가 선택하게 된 삶에 대해 큰 긍지를 느끼며 치열하게 살아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인호는 러시아 대사 시절 남성들의 편견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경험담을 들려준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대신 그 조건으로 타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용에 기초한 새로운 화합이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방혜자는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동양의 정신문화에서 찾고 싶어 한다. 이제는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고 온 인류가 ‘청세포 가족’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안방 아랫목에 둘러 앉아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는 기분으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이 70대(한 분은 60대)의 지성들의 이야기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격동기의 세월을 각자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이들의 요구는 높은 경지에 이른다. 실천이 중요하고, 자기 중심이 있어야 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나눔, 또한 관용의 정신을 지녀야 하며,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아야 한다. 한 시대를 앞서 산 이들의 성찰이 우리 후배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길잡이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덕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부속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했다. 현재는 전북학교급식연대 상임대표와 전주한울생활협동조합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수필집 『내 삶의 흔적은 어디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