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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 |
[백제기행] 이제는 전설이 된 이야기들, 그리고 전설이 될 이야기들
관리자(2007-04-13 18:07:05)
[백제기행] 이제는 전설이 된 이야기들, 그리고 전설이 될 이야기들 글 | 이상훈 『 진안중학교 교사 』 백제기행, 어느덧 17년이 흘렸다. 그때 나는 문화저널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몇 번의 백제기행을 하기 위해 사전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땅 끝 마을 해남이며 보길도, 청학동, 공주 등을 버스타고 정처 없이 나그네가 되어 다녀왔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운 좋게 백제 기행을 두 번씩 다니게 되었다.   결혼 후 진안에 살면서 문화저널과의 일이 어렵게 되었다. 지역에서 교육운동을 하고 민속 문화를 찾아다니는 일로 생활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저널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독자가 되어 몇 번 문화저널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마을을 주제로 하는 백제기행을 시작한다는 김승민 실장의 전화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것도 그 출발을 진안을 중심으로 한 마을과 마을 숲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안내자가 되면 좋다는 말과 함께이니 더욱……. 그런데 정작 12월의 백제기행은 무진장 내린 눈으로 2월로 연기되고 말았다. 진안에 살면서 진안을 사랑하게 된 나는 무진장이란 말에 무척 속상함을 느낀다. 그것은 유홍준 교수가 함양산청을 답사하는 길에 소양 화심을 지나면서 ‘가든’이 즐비하다면서 비웃고, 무진장을 지나면서는 모래재는 사뭇 험하다 하면서 사고가 잦다느니, 두 번의 답사 실패를 무진장의 많은 눈에서 내린 것에 연유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압권인 것은 아주 캄캄했던 시절의 캄캄한 시골동네 이야기라 하면서 1972년 11월 유신찬반투표에서 무진장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여 주었는데 투표율이 자그마치 103%이었다고 하면서 무진장 쏟아져 나왔다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든 많이 내린 눈으로 2월에 백제기행을 떠나게 되었다. 전날 집안행사로 나는 전주에서 일행과 함께 출발할 수 있었고 평소 사람들 앞에 맥을 못 추는 나로서는 전날 마신 술이 용기를 주었다. 낮 익은 얼굴도 보인다. 실로 얼마만의 백제기행인가. 취기로 인해 이런저런 말들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술주정이라 했다. 마을은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작은 국가와도 같은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곳이다. 그래서 마을은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영역이 모두 갖추어진 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마을에 대한 개념은 있어도 마을 숲에 관한 용어는 생소하기에 번잡을 무릅쓰고 마을 숲이 어떻게 조성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몇몇 사람들이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느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때때로 마을입구가 허하여 어떤 방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렇다고 몇 명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보다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큰 화재 나서 마을이 완전히 황폐화 되었다. 재앙이 발생한 후 마을사람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마을을 황폐하게 된 원인이 밝혀진다. 마을입구로 세찬 바람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이후 마을사람들은 나무를 심을 것을 결정한다. 빨리 자라고, 튼튼하고, 바람을 막아낼 수 있는 수종을 골라 심는다. 될 수 있으면 적게 심어도 효과가 날 자리를 골라 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수구(水口)가 좁은 곳을 심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조금씩 나무심기를 하면서 보호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화재가 줄고 별 걱정 없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일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마을 숲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큰일이었다. 마을규칙을 세우고 서로 감시했지만 훼손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방책을 생각해 내게 된다. 그것은 마을 숲을 공동의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신앙성과 신성성을 부여했다. 마을 숲의 땔감을 가져다 쓰면 죽는다거나 병신이 된다거나 하는 신성성과 함께 여기에 제를 모시면 마을이 평안하고 마을 사람들이 잘 살수 있다는 믿음이 부가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숲이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을 숲은 이렇게 조성되었고 보존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민속 문화를 간직한 보고(寶庫)이면서 생태환경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기행의 첫 번째 도착지는 진안 정천면 하초마을이다. 하초마을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던히도 소개했던 마을이다. 마을 숲이며 돌탑, 선돌 거북 등 민속 신앙물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고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터를 잡고 살면서 터가 좋지 않으면 떠나지 않고 모둠살이 공간을 명당화하기 위하여 여러 비보책(裨補策)을 강구했던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돌탑, 선돌, 장승, 짐대 등 민속신앙물이다. 하초마을의 숲은 일제 때 베어지면서 마을에 화재가 발생하여 다시금 조성하게 된 숲으로 일명 ‘새내숲’이라 부른다. 우리 일행은 편안하게 하초마을의 돌탑, 선돌, 거북 등을 살펴보았다. 하초마을 거북은 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거북꼬리가 향하는 마을에 복이 온다고 믿고 있다. 거북을 두고 마주보고 있으면 마을마다 자기 마을에 복을 받기 위해 밤마다 거북의 꼬리 방향을 옮겨 놓는 일이 종종 생겼으며, 심한 경우에는 마을끼리 싸움을 하는 경우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여유롭게 마을중심의 느티나무를 보고 논두렁을 줄지어 걸으면서 봄이 멀지 않음을 느꼈다. 은천마을로 향했다. 은천 마을은 마이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우리 부부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가르친 형제자매가 많아 더욱 인연이 깊은 마을이다. 은천마을 초등학교가 폐교된다는 말을 듣고 무척 아쉬웠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버스나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한다고 하니 더더욱 그랬다. 사람들은 말한다. 친구 몇 있는 학교보다는 친구가 많은 학교가 훨씬 경쟁력이 있지 않느냐고. 그럴까? 우리는 살면서 평생에 친구가 몇이나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곳 초등학교는 현재 예술 창작 스튜디오로 변신하였다. 은천마을에서 우리일행의 호기심과 웃음을 자아낸 것은 은천마을에 기이하게 만들어진 돌 거북이었다. 몸은 거북이고 머리는 동자승을 하고 있다. 인면귀체(人面龜體)라고나 할까? 사연인 즉 도난당한 거북의 모습이 마치 외계인, 이티(ET)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모습처럼 복원한다는 것이 목에 주름이 진 동자승으로 복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먼 훗날 전설처럼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다. 은천마을 거북이 조성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마을을 마주보는 서촌 써리봉이 화산(火山)이어서 기미년(1919년) 화재 때 마을 전체가 불타 없어지는 일이 생겼다. 이후 이 마을을 지나가던 대사가 화재를 막을 비방으로 거북을 만들라고 하여 경신년에 자연석을 다듬어 세웠다. 거북은 수신(水神)으로서 화재막이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방죽을 2개 만들고 나무로 용 형상을 만들어 묻기도 했다. 마을에 연못을 만드는 것은 방화수(防火水)로서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용은 오리나 거북과 같이 물의 속성을 지닌다. 이 모두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방책에서 나왔다.’ 섬진강 발원지 데미 샘으로 향한다. 원신암 마을에서 내려 종종히 산을 오른다. 최근에 몇 번을 왔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너무 좋다. 상쾌하다. 바람도 온기가 배어 있다. 개발되지 않은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사람들은 진안에 왜 사느냐고 묻는다. 그냥 웃는다.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가는지 모른다. 젊은 나이에 궁벽한 농촌에 산다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내 가족과 함께 자연과 가까이서 산다는 것은 어느 것보다도 큰 행복이다. 그렇게 산책로를 따라 데미샘으로 향했다. 일행 중에서 힘들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상에 도착했을 때 모두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점심 후 운교리의 물레방아를 보러 갔다. 매사냥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던 고 전영태 할아버지 댁이다. 주인을 잃은 정미소는 외롭게 보였다. 요즘 농촌의 현실을 간직하고 있는 정미소 한켠에 커다란 물레방아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한때 영화를 누렸던 물레방아는 말이 없다. 방문객들은 이구동성으로 보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여기에서 고 전영태 할아버지 동생 며느리를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도 이곳 집안과 연이 있어 반가웠다. 하기야 우리나라 사람 사돈에 팔촌을 대면 어느 누가 친척이 아니 되겠는가? 현재 매는 고 전영태 할아버지의 조카가 기르고 있고 며느리 덕분(?)에 매도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쓰기는 했지만 예전에는 백제기행 안내자가 기행 글을 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글을 쓰면서도 대단히 황당함을 느낀다. 그래서 나도 꾀를 부려보려 한다. 함께 동행 했던 정읍에 사시는 이희우 님의 계남 정미소 느낌을 옮긴다. 정미소에서 정철성 주간이 우리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계남정미소에 갔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사진작가 김지연 그는 왜 나를 감격케 하는가……. 정읍에도 많은 정미소가 폐허가 되고 있다. 방앗간은 이제 떡 방앗간이 주종이고, 쌀 찧는 정미소는 영어로 된 알피씨가 전담하다시피 하는데 그래도 몇 군데에는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문이 닫힌 채 빨간 페인트칠이 되어 놀고 있는 정미소를 볼 때마다 늘 속이 아려온다. 아, 쌀 보관증을 잃어버려 곤경에 빠진 적이 있다는 형의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려나? 가을걷이 끝나고 경운기에 잔뜩 실려 우리 집 나락들이 방앗간으로 향하던 날의 기억이여, 기계소리 요란한 속에서 나락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하얀 쌀이 나오면 한가마니씩 받아서 어깨에 메고 착착 쌓곤 하였지, 그리고 집에는 먹을 것 몇 가마니만 먼저 가져가고 나머지는 보관증을 받거나 팔아버리곤 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정미소가 없어서 가까운 부안군 백산면 대죽리 방앗간이나 영원면 백양리 백양 방앗간을 주로 이용하였고,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나 같은 지역인 이평면 창동 방앗간은 어쩌다 한번 가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 방앗간 중에서 3곳은 중단되고 대수리만이 돌아가는데 요새는 2마지기만 남은 논에서 나온 벼를 황토현 근처 이평면 돈지방앗간을 이용한다. 돈지방앗간의 주인은 젊은 부부인데 부모에게서 물려받아 정미소를 운영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로 이용하던 방앗간의 이름이 재미있다. 대죽리 방앗간은 대머리 방앗간, 백양리 방앗간은 황새다리 방앗간, 대수리 방앗간은 수탱이 방앗간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대죽리의 한자명은 큰대 대나무죽자인데 본래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나무마을이 변한 대멀이, 대머리로 불리어진 것이다. 그리고 백양은 배양구지(뱀곶)로서 풍수지리상 황새의 다리라 해서 보통 황새다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수청리는 수탱이로도 불리우니 수탱이는 물이 모여들던 곳(배들판과 동진강의 권역)으로서 수성리, 대수리, 소수리, 하청리 등의 마을 이름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정미소 앞에는 주막집이 응당 있고, 정미소는 농민들에게 급전도 빌려주던 대출금고이며. ‘ㅇㅇ정기화물취급소’란 간판을 겸해 달고 있었다. 그러나 시절이 바뀌어 주막은 사라지고 돈 장사도 끝나고, 택배의 전성시대에 밀려 화물대리점 노릇도 마감을 했다. 그러한 즈음에 70넘어 평생의 소원을 위해 3억쯤을 투자해서 정미소운영을 시작한 이는 전기요금도 못내는 궁함을 맞기도 하였다. 여기저기 빨간 옷을 입고 쉬엄(休業)을 차리고 있는 이름만 달고 있는 정미소를 바라보면 아쉽기만 하다. 오늘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에 갔는데 두번째 기획전으로 ‘마이산으로 가다’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진짜로 돌아가는 방앗간, 그 한켠에 자리한 전시공간을 둘러보고 밖에 나가보니 어느 집에서 나왔을까? 사각 홈이 숭숭한 기둥하나가 벤취가 되어 놓여 있었다. 아! 그 순간 나는 감격에 겨운다. 공동체 박물관이라는 이름, 예쁜 정미소 내부 모습, 추억 깊은 사진들, 그리고 집기둥으로 만든 벤취가 주는 감동을 어찌 감추리오. 나는 앞으로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깊이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기행은 막바지로 다다른다. 또 마을이다. 진안의 8대 명당중 하나인 원강정 마을, 멀리서 바라보아도 아주 전통이 깊은 마을임을 금방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마을주위와 중앙에 고태가 나는 건물들이 이를 말해준다. 영계서원, 영산사, 오현사, 병남정, 쌍벽루 등이 그것이며 이러한 문화유적이 마을 주변에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그 원형이 잘 보존된 당산제가 행하여지고 있다. 원강정 마을은 북수골(北峀谷)계곡 물이 마을 한가운데로 흘러 마을앞 소(沼)가 형성되어 있어 강창(江昌)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강정(江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 절과 성터가 있어 매우 오래 된 마을임이 틀림없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고 조선시대에 천안 전씨, 영산 신씨, 동래 정씨, 남양 홍씨, 연안 송씨 등 5성씨에 의하여 터가 형성되었다.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에는 둥글고 커다란 들독이 있다. 그 옛적 백중날에 머슴 잔치를 하면서 힘자랑을 했던 들독이 이제는 그때의 추억을 간직한 채 놓여 있다. 원강정 마을은 역도선수 전병관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한데, 젊은 전병관 선수가 젊었을 적 들독을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또한 먼 훗날 전설이 될 것이지만……. 우리는 순박한 예술인 손내 옹기의 이현배 씨를 보는 것으로 기행을 마쳐야 했다. 전주 막걸리집에서 한바탕 뒤풀이를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나는 다음날까지 술이 깨지 않은 채로 마냥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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