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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장] “사는 날까지 더 공부혀야지! 힘을 다혀서”
관리자(2007-03-14 11:50:15)
모필장채주옹 “사는 날까지 더 공부혀야지! 힘을 다혀서”
구술 채주봉 ㅣ 정리 김승민 ㅣ 사진 유백영
어머니 산, 모악산 자락.
금산필방.
70여년을 한결같이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솔질하는 마음으로, 붓을 만드는 이가 있습니다. 세 평 남짓한 금산필방의 채주봉(85세)할아버지는 새벽 3시 30분이면 금산사에 올라 미륵님께 기도드리고, 수도하는 마음으로 붓을 만듭니다.
연필에, 볼펜에 밀려 별로 찾는 이는 없어도 이것이 우리의 정신이고, 문화라는 자부심으로 한눈팔지 않고 달려온 한평생입니다. "붓에는 선비의 정신이 깃들어 있고, 붓을 통해 선비들은 은근하면서도 강렬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어왔다"고 말하며 털을 다듬고 대를 손질하고 붓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여만 자루의 붓을 만들어 온 채주봉 할아버지는 "글이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대변해 주기 때문에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마음을 읽을 수 있듯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재료로 만든 좋은 붓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붓과 함께 살아온 한평생.
채주봉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그게 혼을 담아서 허는 거여
전라남도 함평이 고향여. 본 나이로 1923년 생인게 올해로 여든다섯.
형제가 3남 2녀 중 장남이지. 어머니 아버지는 농사졌어. 스물세 살에 여그 올라왔응게. 금산사 미륵불 신앙을 따라 정착이 된 거지. 1945년에 해방되면서 올라왔어. 한학을 공부혔어. 종교로 말미암아 온 거여. 가족이 다 왔어. 그건 뭣이냐먼 해방 후로 좌우관계라고 굉장히 살기가 어려운 때였어. 피신 온 거였지 실지가. 거그서는 살수가 없응게. 올라고 해서만 온 것이 아니라 신상유지 허기 위해서 와진 거지. 살기가 어려웠지 그때는. 함평에서 공부허고, 농사짓고, 그렸어. 함평 해보면 용산리라고 광주서 영광 법성포로 가는 중간 쯤 될 것이여. 평강 채 씨. 우리 일가들이 군산 옥구 그 근방의 많이 살어. 평강은 휴전선 그 근방이여. 그때만 허드라도 서당이 동네마다 다 있었어. 연중 허는 디도 있지만 농한기에 허는 디도 있었고. 한문공부 많이 혔어. 인재가 모도 한학을 혀가지고 촌에서 나왔는디 요새는 도시에서 인재가 양성되드라고.
매일 아침이면 세시 반이면 절에 올라가는 디. 올 아침에도 갔다 왔고, 절에 가서 미륵불한티 절하고와. 세시 반에가먼 다섯 시먼 내려와. 시간 반 걸려 그런 게 기도드리는 것도 좋고, 운동하는데도 좋고. 붓 관계는 요것은 팔일오 해방되면서 시작혔응게, 그러먼 지금 나이가 팔십 오세거든 스물세 살에 시작혔응게 육십년 이상이 되었다는 결론여. 붓 관계는 연수로 그렇게 되아요. 그때 당시는 행상. 붓을 만들지 아니까 가을철에 대든지, 털이든지, 재료를 준비해가지고 서당 방에 가서 인자 즉석에서 직접 만들어 줬다고 실감나게.
함평, 우리 웃동네에 붓 만드는 사람이 있었어. 붓 만든 동기는 왜정 때부터 서예를 좀 허고 있었거든 긍게 취미가 있어서 마음에 맞는 붓을 헐라고 헌것 이였었고. 또 종교관계에서 붓을 많이 쓰더라고. 그래서 붓 만들기 시작이 된 것이지. 서예도 혔었고. 종교관계에서 부적 만들 때 필요헌게 허고. 그게 혼을 담아서 허는 거여. 1945년에 종교에 헌신험서 배웠어. 정준채라고 있어요. 거그 전라남도 함평에. 장인이지. 권위가 있었어요. 이웃마을 사람이고. 내가 그때 스물 세 살일 때 그분이 한 육십 되았나. 돌아가셨어. 한 삼년 배웠어. 햇수로는 삼년도 안되것고만 내가 자수로 만든 것이지 기법만 배우고. 한 일 년 기법 배웠을 것이여.
서당이 딱 끓겨 버리드만
종교관계에서 쓰고 헌게 무상으로 그냥 헐라고 했었지. 다른 사람덜이 재료 대는 받어야지 쓰냐고 말이지, 그랬지. 천도교, 대종교니, 종교가 많다고 근디 말허자먼 나는 순천도. 한국종교가 뭣이냐 말이지. 불교먼 인도고, 공자는 중국이고, 기독교는 서양이고, 한국종교가 뭣이냐 말이지 한국종교는 민족종교. 갑오동학혁명헌 천도교, 단군계통이라든지 한국종교, 민족종교는 다 이렇게 되야. 종교 얘기 헐 라먼 헐 말이 많은디. 그래서 여기에 헌신적으로 허기위해서 붓을 만들기 시작헌것이지. 무상으로 했었고. 그전에는 서당 방에서 행상을 했지. 행상이란 재료를 가지고 서당에 가서 붓을 만들어 준거. 즉석에서 찾아가서 하룻저녁 잠서. 전라남북도는 거의 다 거쳤을 거여. 도보로 걸어서. 직접 즉석에서 만들어 준 게 얼마나 실감날 것이여. 팔일오 해방 허고 육이오 전쟁 허고 서당이 딱 끓겨 버리드라고. 없어져 버리고 지금 시방은 어디 서당이 있들 앉혀. 어디 갈디가 없드라고. 여그가 관광진게 여그 앉았으먼 다 만나지 것 드라고. 글 안컷어. 그전에는 이렇게 관광시설도 안 된 것이라. 여그 있으면 다만나지는디, 찾아 당겨야 되는디. 찾아 댕길 거 없이 여가 앉았으먼 다 만나. 종교생활은 45년도부터 했고 내가 여기 정착헌것은 한 33년인가 되지 아마. 붓을 만들긴 만들었어도 행상을 했지.
젊은 사람들은 작파했지 품 파는 것만 못헌게
복남면 평사리에 처음 왔어. 부모님 다 거그 있었지. 농사짓고. 남동생 둘하고, 여동생 둘하고, 살아 있는 것이 남동생하나. 여동생 하나.
붓 만든 년도로 봐서 대한민국에 나만치 헌 사람이 있들안혀. 육십년 이상 만들었는디 이 나이에 허는 사람이 있들 앉혀. 거기에 전력해가지고 문화재 될라 했으먼 진즉에 했을 것이여. 그런데는 신경 안써. 그냥 종교생활 험서 무심코 헌것이지. 그런 게 신경을 안써. 수속이 복잡허고. 문화재 그거 헐라 먼 제자를 양성해야 허고. 뭣을 해야 되아. 나 혼자 허고 말지 말지 그렸어. 도청 옆의 불교용품점 허는 셋째 아들이지 붓을 잘 만들거든. 근디 타산이 안맞어. 나랑 같이 있다가 불교백화점을 시방 허고 있다고. 기계 발달 되고, 인공, 수공해가지고는 도저히 안 돼. 내가 알기에 옛날의 전국적으로 붓 만든 사람이 한 이 백 명 되. 지금은 불과 숫자가 기십명 까지는 될 란가. 중국산이고 뭐고 인건비가 싸니까 그렇고. 누가 헐라고 헌 사람이 있들 안 허고. 타산이 안 맞응게. 형편이 그렇게 돼야 있어. 기계사용시대라 인건비 안 맞응게. 인건비 싼 중국치가 막 쏟아져 버리고. 또 그러고 서예 허는디가, 팔일오 해방 후로 집안의 액자나 그림 한 폭이라든지 글씨 한 점 걸어 놀라고 혔었는디 인자는 사가들 앉혀. 글씨 쓴 사람이 밥 먹고 살기가 힘들게 되았다고. 살만치 사버렸거든. 이삼십년 전만 허드라도 굉장히 인기가 좋았지. 붓도 좋았고. 사들 안헌게. 밥 먹기가 힘들은게. 시방 동사무소니 예술회관이니 그런데서 공짜로 가르치고 글 안 해 그거. 근근이 시방 글씨 쓰는 사람이나 맹그는 사람이나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이지. 수요가 많들 안코 거그다 중국산 막 쏟아져 나오고. 그라도 맥은 끓치든 않을 거여. 아무리 중국거 쏟아지드라도. 그렇게 될 것이여. 붓 이라는 게 일본사람은 일본사람에 딱 맞는 붓을 만들게 되고, 중국 사람은 중국에 맞고,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에 맞는 붓을 만들어 써야는디, 인건비가 싼 게 한국 사람이 중국 가서 만들어 와버린다고. 그러게 되니 뭐 별거 있것어. 그거라도 허는 사람이 있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거의 작파했지 노동 품 파는 것만 못헌게. 나이 먹은 사람들, 헐 길이 없는 사람들이 허든 것인 게 이해타산을 떠나서 이렇게 허고, 그렇게 돼야 있어.
전라도 서당이란 서당은 다 다녔어
고인 되았지만 강암 선생 같은 이가 접촉이 되았지. 강암 선생이 김제 여그 백산 사람이거든 강암 아버지가 유재 선생여. 거그 가서 나도 수업도 허고, 글씨공부도 허고 그렸지. 요새 그 강암 선생 집안의 누구여 시방, 강암 아들이 전주시장이지. 그 사람들 다 요만해갖고 그랬다고. 그때 붓 같은 것 거그서 만들어 주고 나도 글씨 쓰고 그랬어. 김제 학성강당허는 이도 잘 알어. 그 사람도 한창 곤란했거던. 그때부터 그 집에 가서, 먹고살기 힘든게 고구마 쪄 먹어감서 거그서 만들어 주고 그랬어. 그 어른 허고는 몇 십 년 되지. 광주 서암 선생이라고 그 사람이 육이오 때 여그로 왔다고. 김제 광활 어딘가 있었을 거여. 그전에 행상헐적의 전라남북도 서당이란 서당은 다 다녔어. 한20년 댕겼지. 주로그때는 간재선생 계통 이라놔서 전주로 말허먼 최학재, 최금재. 강암 선생 아버지 송유재. 고창허먼 권양재, 태인허먼 염재. 모두다 권위자들이여. 다 그분들 붓을 내가 다 대고 그때 그랬어. 다 알어. 쟁쟁 헌 그분들 아니것어. 강암 선생 처가가 구이면이지. 전의 이 씨 집안이지. 그런 사람 저런 사람 모다 모르는 사람없제. 요새는 원광대학교 여태명, 잘 알아. 정읍의 지암. 붓도 거시기허고 글씨도 여그 있어. 글씨 좀 쓰는 사람치고는 붓을 사쓰들 안는다고. 선물 받어 쓰지 뭐. 강암 선생 같은 경우는 붓을 고쳐달라고 그래서 손질도 해주고 그랬지. 글씨 쓰는 사람들은 붓을 안사도 붓이 많어. .
작은걸 많이 썼어. 큰 붓은 별로 쓸디 가 없지
붓은 기술 5할, 재료 5할 그런다고. 재료 선택이 좋아야 되아. 아무리 잘 헌다고 허드래도 재료가 좋지 않으먼 좋은 게 나오들 안 커든. 쇠나 나무나 본질이 좋은 걸 가지고 가공을 해야 나오제 아무리 기능이 있다 허드래도 쇠나 나무 같은 것도 본질이 안 좋은 먼 안 좋아.
짐승털이라먼 다 되아. 그전에는 노루털. 장액 붓을 제일 많이 썼지, 저드랑이 털여 노루장 자 장액붓. 왜 그것을 많이 쓰냐면 노루 털은 털이 자룹거든. 그때는 필기 쓰는디가 많어. 대서소 있었지, 호적계 있었지, 약방에 있었지, 전부 기록 헐라 먼 전부 붓 인디 연필이고 볼펜이고 없이 말이지. 행정사무가 전부 붓이지 말이지. 그전에는 약방에서도 많이 썼고. 필기구가 그 시절에는 작은걸 많이 썼어. 큰 붓은 별로 쓸디 가 없지. 어쩌다 현판 같은 것 쓸라 먼 거시기 헐까 현판 같은 것도 큰 붓을 쓰기도 허지만 작은 붓을 묶어가지고 쓰기도 허고 그렸어. 큰 붓은 쓰들 안 헌게 전부가 작은 붓은 필기구라 뭐든지 기록헐라먼 붓이 쓰였지. 많이 썼어. 붓 만든 것이 동네 동네 군단위에 하나 면단위에 하나는 있었을 것이여. 많아야지 그 숫자를 대지 않것어. 전주 허먼 여 완산동에 최도숙이라고 그분이 붓 잘혔어. 중인리라고 주 씨들이 그 동네에서 만들었어. 주 씨 집안의서. 황등에 거그서는 유 씨들이 온 동네 사람이 다 만들었지. 일종의 부업으로 헌것이지. 농사지어놓고. 집집마다 그걸 허고 있었다고. 그만큼 수요가 딸린 게 그렇게 헌것이지. 전부가 노루털, 작은 붓. 제일 많이 썼어. 고급 붓이라 먼 청솔모털 청모, 족제비털 황모. 주로 이걸 많이 썼어. 요샌 쓰들 앉혀.
붓이, 목공일을 허드라도 집짓고 건축일 잘허는 사람 있고, 농 짜고 그러는 소목장이 있고 허드기 붓을 만드는 것도 큰놈 만든 사람 있고, 작은 붓 만드는 사람 있고, 전부 다 허들 한혀. 나는 노루 털로 만드는 장액 붓이 전공여. 큰 붓은 나 아는 사람 헌티 부탁혀서 갖고 와. 만들 주는 알지만 전공은 장액 붓이여. 책 같은거 필사 헐라 먼 요 붓이 필요혀. 분야가 여러 가지여 붓도. 여기 있는 것도 여러 사람 솜씨가 들어 있지 나 혼자 다헌 것이 아니라. 허는 솜씨가 분야별로 있어서 다 구비되어있지 시방.
옛날에 광주에 한 50명 있었지. 광주가 제일 많이 만들었지. 지금은 광주에 문화재 된 사람이 세 명인가 있어. 그것도 헐라 먼 그런디 근래에 되았지. 광주도 세 사람 이상은 안 된디야 안종선씨가 첫 번에 되았고, 문상호씨가 둘째, 셋째가 김복동, 그 사람이 제일 잘혀. 물론 제일 늦게 되었어도 그 사람은 70넘어 되았을 거여. 안종선씨는 이미 죽었고, 문상호는 서울서 한다고 그러고, 김복동씨는 몸을 다쳐서 그런 디야. 서당 가서 직접 만들어 주먼 실감나고 잘 팔린다고. 이것이 어찌게되냐면 그전에는 전일을 글공부를 했었는디 형편이 어려운 게, 봄에 3,4월부터 농사짓기 시작혀가지고, 9,10월까지는 농사를 지어. 10월 동지섣달에 서당 방에 앉고, 정월 2월 서당 방에 앉고, 4개월, 서당 방에 앉어. 6개월, 1년의 절반은 농사, 절반은 공부, 그렸지. 나는 여름철에는 절으가 수양 허고 있다가 그때 당해 가지고 10월 달부터서 한 6개월 벌어가지고 생계가 다 나오드라고. 집안도 쌀 몇 가마 팔아주고 어쩌고 허면은 되고. 산 으가 입산 수도 허고 그렸지. 지금은 여그가 딱 앉았응게 그러지 갈 데도 없고 그전에는 그랬다고, 행상헐때.
평생 살림살이를 못해봤지
아버지가 채수종, 어머니는 강용순. 함평이 고향이여. 어머니 돌아가신지 한50년 되고, 아버지 돌아가신 지는 한 35년이나 되는고 만. 분가해가 살았지. 인자 나는 붓이 업이라 그렸고, 두 양반은 농사짓고 살았어. 결혼은 열일곱에 함평서 했지. 중매 결혼혔지 다. 그때는 늦었다고 열다섯, 열여섯에 했는디 그때는 중은 되았것지 거의 다 이십 안에 다 혔응게. 열아홉먹으먼 굉장히 노처녀 노총각이고. 그런 게 "열아홉 큰 애기 섣달그믐에 개밥퍼준다" 그렸어. 부야가 난 게 막 퍼준다고. 아주 늦은 만혼이라 열아홉에 허먼. 스무 살에 허먼 과허고. 남자는 나이가 적어. 여자는 항상 두세 살 많고 그렸단 말여. 나는 동갑이고. 김순덕이여 이름이. 8년 전에 사별했어. 내가 가사에 별반 신경을 안 쓴게. 붓 좀 팔아가지고 생계유지, 쌀 몇 가마 팔아주고 그러면 집안일 끝나. 내가 평생 살림살이를 못해봤지. 고생 많이 했어. 내가 금전관리를 생전 안 해봤응게. 알아서 허라고 그렸어. 삼남사녀 칠 남맨디. 딸들은 다 전주가 다 있고 넷 다. 큰아들은 황산면 소재지 거그서 농사짓고 있고, 둘째아들 죽었고, 셋째 아들은 불교용품점 전주서 해. 셋째가 붓을 배웠는디 타산이 안맞응 게 집어치웠어. 헐지는 알지. 손주가 원광대학교 서예과 나왔는디 배우라고 서울로 보냈는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어. 내가 나이가 있는디 언제까지 허것냐. 기반은 잡아 놨응게. 서예과 나왔응게 글씨는 잘 쓰거든. 글씨는 쓸 줄 알고. 붓은 꼭 기능을 배우는 것보담도 물건 구입을 허드래도 알어야 되고. 고쳐도 줘야 되고 내 스스로 알아야 되는 것이다. 아마 헐 것이여. 여그다 들여 앉힐라고 허는디. 내가 갈쳐 놨었어.
가다 뺀다고 그런디 붓 끝이 삼각이 돼야 혀
붓 만드는 과정이 두 가지가 있어. 묶음 붓하고, 지짐 붓허고.
실로 묶어서 묶음 붓이라 허고 한국 붓은, 벌 밀납으로 지져가지고 지짐 붓이라는 것이야. 철판으다 놓고 지져. 한국 붓은 지짐 붓이 원칙이지. 일본이나 중국은 실로 묶어서 요걸 쓰더라고. 짐승 털은 다 쓰는디 거그에 아무 때나 쓰는 게 아니라 시기가 있어. 11월 달부터서 그 이듬해 1월 2월, 한 4개월 그때 치라 되야. 더워지먼은 털이 끝이 안 살아나 가을철하고 겨울철은 쪽쪽 펴는디. 봄이먼 털갈이도 허고. 쓰들 못해. 겨울철 그 이듬 시방 2월까지 3월부터도 안 좋지. 채취 허는 시기가 있어. 장액 붓만 주로 만드는디 그때만 혀도 노루가 많이 잡혔는디 지금은 숫자도 적고, 국가에서 못 잡게헌게 구헐 수가 없지. 요새는 축지방도 모도 볼펜으로 쓸라고 그러는디. 이것이 뭔 필요허것냔 말이지. 글 안컷어. 노루 털은 극히 귀해. 나타나게 사고팔고 허들 못혀. 별로 쓸데도 없고 컴퓨터로 쳐버리먼 별 글씨 다 나오등만. 요런 건 필요 없다고. 노루 털도 노루는 안 되고, 고라니 털이야 되어. 고라니 다리 밑의 털. 족제비는 꼬리털. 청솔모는 꼬리털. 요새 제일 많이 쓰는 게 염소는, 목덜미 털.
짐승털 중에도 뭔 짐승이든지 암놈은 안 되고. 수놈털 만 써. 그것이 왜 그러냐면 털도 설명 허자먼, 꿩이나 닭을 보더라도 꿩도 그러고 닭도 그러고 수놈이래야 금빛 나고 윤기 나고 그러지. 사람은 여자가 고운디 짐승은 수놈이 라야 돼. 털도 눈매가 있다고, 이렇게 윤기 나고. 여하튼 짐승은 수놈털이야만 돼. 그런디 염생이도 다 안 돼. 흑염소는 또 안되아. 흰 놈이라야 돼. 눈매가 그려, 눈매가. 그러고 짐승 털은 뭔 털을 다 쓸 수 있어. 다른 털은 괜찮은디 염소 털은 지름기가 많어. 지름을 빼야 돼. 지름이 많응게 지금은 공장에서 쪄. 지름 빠지게. 공장에서 허는 일이고. 털을 깔아놓고 전기 대리미로 지져. 지름기가 촉촉헌디 지지먼 다 빠지거든. 지름을 왜 뺐냐먼은 먹이 흡수가 안 돼. 지름 허고 상극이잖아. 빼내버려야 먹이 흡수가 되고. 딴것은 지름이 없드라고 염소만 그려. 지름 안 빼면 먹이 흡수가 되들한코 힘이 없어. 부들부들해가지고. 꼭 지름을 빼야 돼. 지름을 잘 뺐냐 못 뺐냐 이걸 가지고 좌우허는디. 본래 하얀 털인디 전기다리미로 눌러가지고 막걸리 색깔 날 정도로 놀짝놀짝 허게 빠져야 제대로 빠진 거여. 고정도 빠져야 붓이 힘이 있고 쭉쭉 일어서고, 글 안허먼 아무 힘이 없고, 먹도 스며들지 않고, 그런 게 그걸 잘 빼야 돼.
장액 붓은 노루 털을 쓰는디 지름기가 없어. 털 허고 대나무하고 아교풀을 썼는디, 요새는 강력본드 있응게 본드 써. 대나무는 시누대를 쓰는디 요새는 큰 붓 헐라 먼 왕대를 써야지. 털을 손질 헐 때는 나락껍질 재를 가지고 뿌리면 요놈이 꼼짝을 못혀. 기름도 흡수허고. 털이 재를 무서워해. 흩어질라고 허는디, 살살 뿌려 노면은 움쩍을 못혀. 고걸 뿌려놔야, 상극인가 벼 상극. 글 안허먼 막 흩어질라고 그러는디. 지름 뺄 때도 그렇고 움직이지도 안코 꼭 재가 들어가야 돼. 대도 산에서 비어가지고 그냥 햇볕에 말리먼 한 달 두 달 헐 것을 황토를 발라서 말리면 몇 일이먼 말라버린다고. 깨끗하고 쉽게 말르고. 얼릉 말르고 깨끗허게 말르고. 털은 재를 뿌리고 대나무는 황토를 바르고. 글 안코는 깨끗허도 안하고 날짜도 오래 걸리고. 바로 상극이라 그게.
가다 뺀다고 그런디 붓 끝이 삼각이 돼야 혀. 중간이 배가 부르거나 끝이 빨아버리면 글씨가 안 좋다고. 삼각이 돼야 혀. 삼각이 나올게 헐라 먼 털이 여까지 온 놈, 여까지 온 놈, 기럭지가 달라야 혀. 가지런히 해버리면 끝이 없어. 심소의체라 그래 가운데 들어간 놈이 있고 겉에 싼 놈이 있어. 가운데는 잘고 뻣시고, 겉은 길고 부드럽고. 속에 들어간 놈은 칭거리가 져야 돼. 그것보고 가다잡는다고 해. 질게 나온 놈 앞에 나온 놈 칭거리가 져야혀. 고것 조절을 해야 혀. 그래야 삼각이 나오지 고것보고 심소 라고혀. 가운데 들어간 놈 보고 심소. 껍딱입힌 놈 보고 의체. 옷 입은 것 같이, 사람 치매 입득기 그놈은 털이 가늘고 좋아야 혀. 양질을 써야 혀 털을. 긍게 속에 들어간 놈은 털이 뻣셔야 되고 층거리가 나야 되고, 껍딱은 털이 가늘고 좋아야 혀. 속에 털을 굵고 힘이 있어야 되고. 그전에는 큰 붓 헐라 먼은 돼아지 등털미 털로 했어. 힘이 있어. 고놈을 넣었다고 돼아지 갈기털. 노루 털은 힘이 없응게, 족제비 털은 힘이 있어. 족제비 털을 속에 넣어야 돼. 청솔모도 힘이 없어. 청황모피라 그래요. 속에는 족제비털이 들어가고 겉에는 청솔모 털로 만든 것이. 큰 붓 헐 때는 돼아지 갈기털이 들어가야 되고. 요새는 인조모를 쓴다고 속에는. 기계로 만든 거. 얼마든지 뻣시게 허드라고. 일본에서 많이 나오지. 작은 붓은 아닌디 큰 붓에는 들어가. 얼마든지 붓이 힘이 없다면 뻣시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 인조는 어찌 안 되냐면 털이 이렇게 눈매가 있어가자고 밑둥아리는 두껍고 끝이 쪽빠지는디 인조모는 철사같이 끝이 없이 딱딱 끊어진 것인 게 겉에 의체는 안 돼. 심소는 돼도. 인조모 나오기 전에는 돼지갈기털. 조절을 잘 해야혀.
이유도 묻도 안코. 인연이란 게 그런 것이여
일정 때, 갑자생 까지는 징용갔는디 그 사람까지는 군인 갔어. 나는 안 갔어. 한 살 차이로. 그때 갓 쓰고 댕기고 그랬어 내가. 좌우익 그런 것도 나는 해당 없고. 종교생활 했어. 생각도 없고. 타치도 안허고. 해방되던 해 태백산 갔어. 대동아전쟁 허고 싱가폴 함락하고 막 미군이 쳐들어올 때, 고놈이 한국까지 몰아오게 생겼드라고. '인종구어양백이라' 소백산, 태백산에 비경이 많이 있다고. 그래서 거그를 찾아간 것이지. 사람을 구헐 라먼 소백산, 태백산에 가면 살수가 있다. 강원도 삼척군 상장명 현리 드라고. 내가 한번 가보고 싶은디 지금. 피신헌것이지. 살수가 없응게. 팔일오 해방 되아서 바로 내려왔지 인자. 몇 개월 안 있었어.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내 동생들 둘을 데리고 갔었지. 손아래 동생 허고 이종 동생 허고. 강원도 제천 영월 여그로 돌아 댕김서, 이종동생인가 그 사람은 못 따라 댕기것다고 내려와 버렸고. 동생 한나는 양복 기술이 있었어. 미싱. 그래서 강원도 평창군 대하면 인가 거그가 취직시켰지 동생은. 그러고는 내가 가족식구를 데리고 올라갔었지.
함평에서 태백산에 갔다가 해방되아서 여그로 왔어. 육이오 전에, 그때 부모님은 왔지. 종교는 기독교가 되았든지 불교가 되았든지. 인연인가 벼. 제아무리 별시럽게 술 받아줘도 안 듣고, 말 몇 마디만 해도 착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인연인가 벼. 이종하나가 종교에 입교했드라고. 길가에서 말 몇 마디하고 "그래 나도 해봐야 쓰것네" 그렇게 시작 혔어. 이유도 묻도 안코. 인연이란 게 그런 것이여. 부적을 그리고 어쩌고 한다고 말이지. 그래 싸서 그러면 내가 서예에 취미가 있는디 이거면 되것단 말이지. 그래서 되았단 말이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열두 가지 부적이 있어. 이것을 헐란 게 붓이 필요허것드란 말이지. 여기에 헌신을 해봐야 쓰것다 헌것이 붓 만든 동기여. 내 혼을 담아서. 무사는 칼을 쓰고 선비의 헐 일은 붓이란 말이지 목욕제계허고, 정성을 쏟아기지고. 한 3년은 공짜로 나눠썼어. 그래서 얼마 지난게 붓장사가 되버리드라고. 혼을 담아서 헌것이 붓장사가 되버렸고. 생계유지도 되고. 내 자력으로 벌어감서, 넉넉치는 안 허지만. 나이 먹은 사람들은 다 고인되아버렸고 종교생활로도 내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없어. 흔틀안치, 내가 60년이 넘게 종교생활을 했응게 붓 만든 것도 그렇고. 붓 만든 사람이 팔십이 넘게 허는 사람이 없어.
여그가 강증산선생 동곡약방이 계셔서 증산교 묏자리라고 여그가. 그 계통의 종교가 많어. 나는 순천도. 증산교에서는 절에 가면 선종 교종 그러것다. 선종은 공부허는 사람이고 선방의서. 사업승은 절 관리도 허고 그러고. 증산교 계열은 법문파, 주송파 양대로 나눠져. 주송파는 뭣을허냐먼 주문 읽고, 마음수양 잘허고. 사회봉사활동에 전념을 허는 것이 주송파고 법문파라는 것은 현무경이란 책이 있어. 이거에 천지이치가 나와 있어. 이걸 공부허는 걸 법문파라 그래. 법문파의 발상지를 순천도라 그래. 법문파는 학술적 공부허는디고 주송파는 사회적으로 공부허는 디고.
털이 한대지방, 추운데서 나와야 끝이 쭉쭉 펴라
혼자 밥 끓여 먹고 살어. 낙관적으로 맘먹어. 이 나이에 자손들 의지 안허고, 내 자력으로 지낸다는 것이. 내 이번에 세뱃돈 얼마나 들었다고. 나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고. 새벽에 세시 반에 절에 올라간다고. 왜 그러냐 허먼. 절에 스님들 허고 그 시간에 딱 만나져. 법당에 혼자 들어가지 않코. 스님들하고 만날라고. 너무 일찍 가도 안 되고, 너무 늦게 가도 안 되고. 갔다 오면 5시 되아요. 6시에 밥해서 먹고. 일과가 그래요. 신문지 한 장 깔먼 어디서든 작업할 수 있거든. 크기에 따라 다른디 보통 하루에 열 개나 만드나. 맨날 허는 건 아니고. 기준이 애매해. 작은 붓은 그 정도해. 큰 붓은 그렇게 안 나오는 것이고. 갯수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신경을 쓰느냐. 그게 중요허지. 타산이 안 맞응게 헐라고 허는 사람이 없어. 수요가 그전에는 쓰임새도 그렇고 그랬는디. 중국 붓에 밀려가지고. 수작업이라. 우리 아들도 할지 아는지 안 혀. 나이 먹은 사람이 다른 헐 짓이 없응게 용돈이나 벌어 쓸라고 그러는 것이지. 맥이 끊어지든 안는디. 별로 없어. 틀림없어. 설사 많이 쓴다 허드래도. 여그는 인건비가 비싼디 중국 같은디는 공장 같은 디서 분업적으로 사오백 명씩 앉아서 헌답디다. 털이 중국서 나와요. 거그서. 흰 맴생이는 저기 해안가 도서지방에서 좀 키워라. 약간 나와. 노루 털 이것은 강원도 근방에서 좀 나오고. 털이 한대지방, 추운데서 나와야 끝이 쭉쭉 펴라. 청모이것도 만주근방이나 연변 그쪽에서 나와요. 여하튼 털은 한대지방에서 나와. 강원도 근방 것이 제일 좋았는디 전라도 이쪽은 노령산맥 이쪽이 좋고. 노루털같은 것도 다 자력으로 썼는디. 인제 안 나와. 그전에는 전부 붓으로 했는디 요새는 컴퓨터로 다해버리잖아. 작은 붓이 필요 없어. 예술적으로 큰 붓을 써 붙이고 어쩌고 허는 요것이나 거시기 헐까. 붓이 그려.
그전에는 작은 붓이 대 인기였는디 요새는 찾는 사람이 없어
강암 처가집의 도영이라는 사람이, 그때는 책도 전부 족보고 뭣이고 붓글씨로 썼다고. 그것보고 석판글씨라 그려. 일일이 다 썼다고. 그 사람이 그걸 허고 있드라고. 그전에 다 썼어. 그분들은 붓 관계로 교분을 했지. 다른 건 아니고.
여러 번 셋집을 전전을 했어. 몇 간디 댕겼지 그래가지고 여기 자리 잡은 건 나중이지.
문화재고 뭣이고 신경한번 안 썼어. 종교생활만 허지. 헐라고를 앉혀. 그랬단 말이지. 또 특기가 장액 붓인디 그전에는 필요했는디 요새는 안 써. 헐라 먼 큰 거, 큰 붓해야는디, 나는 전공이 아녀. 큰 걸 전공했다면 괜찮었을덴데. 예전에는 큰 건 별 필요가 없었어. 헌디 요새는 작은 붓은 아무 필요가 없어. 장액 붓은 안 찾어. 절에 불경 같은거 적는다든가 잔글씨 쓰는 사람이 좀 찾어. 전부다 큰 것만 찾지. 전에는 동사무소나 약방이나 전부 이걸 썼는디. 큰 걸 양호필이라 그려 요새 시대적으로 각광을 받어. 서예공부하면 이걸 찾아. 직접 만든 걸 직제, 부탁해서 만든 걸 감제. 광주에 감제해서 가져오고 내 것하고 같이, 이렇게 한 세트가 돼. 직제 감제가 있어. 전공이 틀린 게. 공예품경진대회에서 특선한번 했지 하도 허라고 해 싸서. 지역특산품으로 지정돼서 우편판매도 혀.
그전에는 작은 붓이 대 인기였는디 요새는 찾는 사람이 없어. 비문 쓰고, 책등서하고, 족보 쓰고, 그전에 단새 났는디, 지금은 찾들 앉혀. 때가 바꿔져서 그렇지. 그전에는 큰 붓은 잘 쓰들 안혔어. 작은 붓이 대 인기였는디. 시대에 맞춰서 이것도 했어야 허는디.
육십 평생을 도 닦는 마음으로 붓을 만들었어
행상헐 때 이거이 짊어지고 다닌 것이라. 전부 재료 담아가지고. 전부다 들어가. 호롱불, 촛불 켜놓고 만들어 주고 그런 것이라. 서당, 약방, 서예가들. 이런데 들 찾아다녔어. 말허자먼 장인이라허잖아. 안 알아준 것이여. 하인에 불과헌 것여. 말도 허소하지, 허쇼도 안 헌 것이여. 그런디 붓 만들건 그렇들 앉혀. 상대가 상대니만큼 선비로 대접혀. 의관 중에 갓 허고 붓 허고는 대등허게 선비로 대접혀. 그 여타는 장인들 전부 하대혔어. 팔일오 해방 후까지도 그렸어. 이것은 상대가 상대니 만큼 그렸어. 이것은 아무나 허는 것이 아니라 무식헌 사람은 못혀. 학자들 허고 뭔 얘기가 주고받고 대화가 돼야 댈 것 아녀. 유식헌 사람이나 요것 허지 아무나 못혔거든. 알어야 혀. 동석 혀서 한방에서 자기도 하고. 지위가 그렸어. 동등헌 대우를 받은 것이고. 필상은 어떤 사람이 허는 것이냐 먼. 유식헌 사람이 길이 없으먼 하기도 혔어. 헐라 먼 일문일답이 되야 헐것아녀. 그런디 일문일답이 안 되면 어떻헐거여. 요것 짊어진 사람은 대화가 되어. 그런 게 대우받은 것이지. 시방 갓 만든 이가 어디 있는가 몰라. 그전에 봉동 어딘가 있었는디. 세월이 그렸어. 이조 오백년 세월이. 이것만은 그러들 앉혔어. 붓 허고, 갓 만든 이허고 선비 허고 대화가 됐어. 일본은 칼 쓰는 사람이 제일이고, 우리는 글 쓰는 사람이 제일이고 그렸어.
육십 평생을 도 닦는 마음으로 붓을 만들었어. 수양헌것은 남을 테지. 혈서까지 쓰고 공부를 시작혔어. 젊은 세월에 정신일도 헌다고 그렸어. 혈서 쓰고 지혈을 혀야는디 석유호롱에 넣으면 된다 그러더라고. 그러고 담배 잎으로 싸서 지혈했지. 그 만큼 정신일도가 되았지. 그래서 그런 것이라. 앞으로 정진을 더 해야지. 항상 미진 허지. 사는 날까지 더 공부혀야지. 힘을 다혀서. 몸에 관해서는 그렇게 건강헐수가 없었는디. 약방한번 가본 적 없고. 한 석 달 전인가 자다 일어났는디 정신이 빙빙돌드라고, 토헐까 싶고. 청심환 하나 먹을게 되야. 몇 일후에 또 돌드라고, 토허고. 어찌 그럴까 그려서 병원에 가봤는디. 사진도 찍어보고, 검사허고 그런 게 고혈압이래. 까딱허먼 넘어갈 뻔 혔다고. 혈압약 먹은 지가 한 석달되는고만. 인적까지 병원문턱에도 안 가봤는디. 그렸어. 나는 혈압이 뭐인지도 몰랐는디 그렇다고 혀. 절에 갈라 먼 추운게 옷을 많이 입고, 모자 뒤집어 쓰고, 플래시 들고 이러고 간다고. 새벽에. 병을 무시했었는디 당해본게 안 좋으먼 안 좋은 종을 알아야 거기에 대비를 헐것아녀. 그려서 병원 갔어.
남은 생, 더 정진헐 뿐이지, 힘 있는 데까지
붓으로는 성공혔지. 종교에 관련해서 혼을 담을려고 혔던 것인디. 생계유지가 되았고. 이걸 안 혔으먼 내가 뭔 벌이가 있어. 노동일을 허것어. 어찌것어. 가족유지 어쩌케허것어. 이것 일 년에 반절만 허먼 생활유지 되고. 내 공부도 되고. 그렇게 안 되아 버렸어. 입산헐 수 없응게 여가 앉았 응게. 아침이면 절에도 다녀오고, 붓도 팔고, 수양도 허고. 그러지 뭐. 행상은 한 이십 몇 년 혔고만. 그러고 여그에 자리 잡았지. 행상을 오래혔어. 나가야 용돈이라도 벌지. 가족유지도 되고. 입산수도도 할 수 있고. 변산 개암사 같은디. 그런 디서 한 반년동안 산막치고 수도 혔어. 그때 정신은 맑고, 공부허기도 좋았지. 그 때 당시 개암사에 한 백 일간 있었구나. 그때 거그서 같이 공부허던 사람들이 고시합격도 허고. 그랬더라고. 우 아랫방 있던 사람들이. 남은 생, 더 정진헐 뿐이지, 힘 있는 데까지. 나이 한 헌데까지. 죽는데 까지. 미진했다는 건 공부가 미진이지. 붓은 부업으로 헌것이고. 원 목적은 공부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열두 부가 있어. 그걸 내가 몇 만 번은 썼을 것이여. 음력 쓰는 세월이 있고. 양력 쓰는 세월이 있고, 앞으로는 정력 쓰는 세월이 와. 세상이 수평이 되아. 하늘 맘대로 되는 게 아니고, 사람이 먼일을 해야 성사가 되아. 사람이 일을 해야 이루어 지지. 그런 게 공부허지. 행동을 혀야 혀.
우리아들이 헐지는 아는디. 타산이 안 맞응게 안 혔지, 딴사람들도 다 안 혀. 맥은 끊지들 안헐거여. 손자 서예과 나온 놈 그놈 한번 키워볼라고. 지금 서울 가서 배우고 있어. 큰아들 손자. 후계자 둘라고, 내가 기반은 닥아 놨응게. 지금 허고 있어. 나는 장액 붓을 허는디 큰 붓만든 것을 배워야 써. 그런 게 서울로 보냈어. 조각도 헐 줄 알아야 허고, 붓도 만들지 알아야 허고, 붓 팔지도 알아야 허고. 한 3년 후에는 배워서 괜찮을 것이여. 내가 기반은 잡아 놨응게 여기 있으면 전국을 상대로 혀. 전국에 전부 단골이 있다고. 여기 잘만 허면은 괜찮아. 그런 게 손주를 후계자로 헐라고. 이번 설에 세뱃돈만 한50만원 들었어. 모다 모이면 열 몇 명 되아. 내 삶이 평범허든 않치. 일상생활 살림은 신경을 쓰들 안코 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