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 |
[길위의 추억] 거기 인도양 건너 아라비아
관리자(2007-03-14 11:34:06)
거기 인도양 건너 아라비아
박남준 시인
바닷가에 나가 종이배를 띄우던 날들이 있었네
작은 종이배는 멀리 갈 수 없었네
배를 띄우는 아이의 가슴은 언제나 두근거렸지
물결을 따라 흐르던 안타까움은 몇 발자국뿐
이어지지 않는 뱃길이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들었네
- 승 선 -
바다를 보면 떠오르고는 했다. 나 태어나 살던 작은 바닷가 마을 그 갯 비린내.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혹은 다른 낯선 곳일지라도 열린 차창 밖으로 실려오는 먼 바다 내음이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나는 얼마나 안도하고는 했던가.
탯줄의 자궁, 문신처럼 결코 지워지지 않는 몸에 새겨진 지도를 펼치면 박제처럼 고정된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어머니의 강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회귀성의 물고기들처럼 일찍이 바다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어린 날의 소풍처럼 손꼽아 기다려졌다.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자랑하고 싶었다.
“뭐라고 누구누구하고 같이 간다고? 유용주, 한창훈, 안상학, 아이고 일났다 일났어. 아예 이건 숫제 죽음의 조구나. 죽음의 술 조 말이야.”
“걱정된다 정말이지. 관이나 준비해두고 기다릴게.”
아닌게 아니라 그 세 사내들의 떡메 같은 등치들하며 퍼붓는 말술 틈에 이슬처럼 맑고 연약한 내가 어찌 견딜 수 있을까하며 사람들이 입을 모아 안쓰러운 혀를 끌끌 찼던 것이다.
부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항구로 향했다. 현대하이웨이 호, 한눈으로 봐서는 그 크기가 얼마쯤 되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물론 날이 어두워지기도 했다손 치더라도 컨테이너가 이곳 저곳에서 실려지고 있는 까닭에 항구는 낮처럼 환한 불빛이 도처에 비춰지고 있어서 시야를 가늠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부산항이 멀어지고 있었다. 항구는 뭐니뭐니해도 역시 배에서 바라봐야 그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더니 부산항이 저렇게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가물거린다. 보이지 않는다.
섬들과 섬들과 섬들의 바다를 지나 이제 공해 상이다. 현대상선 측에서 미리 준비한 물품이 지급되었다. 작업복으로 입는 바지와 저고리가 하나로 붙어있는 주황색 통옷, 그리고 운동화가 들어 있는 봉투에는 저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떠나기 며칠 전에 창훈이에게 전화가 왔었다. 형은 사전교육 때 안나왔으니 전화로 물어본다는 것이다. 얼마 전 현대상선에서 마련한 승선교육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는데 다른 일 관계로 나는 그 자리에 가지 못했었다.
키를 물었다. 몸무게와 신발 치수를 물어봤다. 허리둘레도 물었던가.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런 문제였다면 왜 웃음이 나왔겠는가. 마지막에 물은 질문에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몇 센티냐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냥도 아니고 화가 나있을 때가 얼마냐니 내가 순간 당혹해할 수밖에 어쩌겠는가. 잠시동안 숫자가 오르락내리락 들쭉 날쭉거렸다.
“음 00센티, 아니 00센티, 글쎄 잠깐 기다려봐. 아니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본디야.”
창훈이가 그랬다. 나지막하고 느긋느긋한 목소리로 항해 기간 중에 무슨 대용품이 지급된다느니 하는 말이 그럴듯하기도 해서 실제로 자로 재보려고도 했는데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나의 진지함과 당혹함을 엿본 창훈이가 먼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꼼짝없이 속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몸무게 55, 키 170의 옷과 250의 신발은 자로 잰 듯 잘 맞았다.
어느 누구의, 어느 나라의 땅도 아닌, 어느 나라의, 어느 욕심도 금을 그어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공해상의 바다에서 비로소 첫날밤을 맞이한다. 가장 먼 뱃길을 가본 것은 군대에 갔다 복학을 하던 81년 여름 제주도를 가기 위해 목포항에서 여객선 가야호에 몸을 실었던 것이 고작이었다. 8시간 30분쯤 걸렸을까. 그 지루하고 망망하던 제주의 뱃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륭, 홍콩, 얀띠안을 넘어
부산항을 출발해서 대략 40여 시간을 달렸을까 밤 10시 무렵 배는 대만의 기륭항에 도착했다. 첫 기항지, 아침이 되어서야 기륭항의 모습을 대할 수 있었다. 항구를 향해 늘어선 거대한 크레인들이 순간 순간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일렬로 정렬해있는 크레인들이 마치 어깨동무를 하고 캉캉 춤을 추는 무희처럼 다리를 번쩍 번쩍 들어올리고 있는 것 같았으며 대양을 향해 진군하는 트로이의 목마를 연상하게도 했고 거대한 남근 상들이 일제히 포효를 하는 듯하기도 했다.
배는 다시 떠난다. 이 기륭항에 몇 개가 내려지고 다시 몇 개의 컨테이너 박스가 실렸을까. 현대하이웨이 호에 실을 수 있는 컨테이너 박스가 3,000여개라고?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배가 중형정도의 작은 배에 속한다니 숫자계산이 잘 되지 않아 곧잘 거스름돈을 잘못 받아 가지고 와서 속이 상하던 내 머리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Jay Hawkings라는 가수가 부른 홍콩이라는 노래가 있다. 강한 비트가 섞인 블루스 풍의 노래를 부르는 그 노래의 끝 부분에는 너무나도 무지막지하게 코를 트르렁 트르렁 골며 웃는 대목이 나온다.
홍콩에 내렸다. 사람들은 왜 아주 즐겁고 황홀한 상태에 이르는 표현을 할 때 홍콩 간다고 할까. 여기는 홍콩, 홍콩에 와서 홍콩 갈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무려 45도 경사의 전차를 타고 PEAK TRAM 공원에 갔다.
찰칵 찰칵 우리들의 이번 항해에 공식사진사인 상학이가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홍콩 예술의 전당 바닷가 낭만의 거리, 눈에 익은 홍콩 영화배우들의 손바닥들이 찍혀있다. 화양연화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양조위 옆에 누워 나도 한 장 찰칵.
한국식품가게에 들려 소주 한 상자를 사서 용주와 창훈이가 번갈아 가며 낑낑거리고 배로 돌아왔다. 홍콩에 가서도 나는 결국 홍콩가지 못했다. 배는 다시 중국의 얀띠안 항으로 출발, 얀띠안 도착. 얀띠안 출발, 여기서 다음 기착항구인 싱가폴까지는 4일이 걸린다고 한다.
태평양, 남지나해 푸른 바다, 해지는 노을, 해 뜨는 일출,
그때 뱃머리의 양편으로 나타나 불쑥 불쑥 자맥질을 하는 돌고래 떼. 작년 이맘때쯤 제주도에서 우도라는 섬을 가기 위해 배를 탓을 때 영화나 사진으로가 아닌 처음으로 야생의 돌고래를 본적이 있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주인공이 돌고래와 함께 바다 속으로 잠겨버리는 영화 그랑블루가 떠올랐다.
파도의 바다를 바라보면 욕망이 뒤끓고는 했다. 눈보라치는 그 바닷가에서 신열에 들떠 수음을 하기도 했다. 죽음으로 질주하는 영화 페드라의 절규처럼 파도 앞에 나가 보이지 않는 길을 묻기도 했다. 악을 써대기도 했다.
싱가폴, 밤 12시 주렁주렁 꽃처럼 환한 등을 걸고 밤배놀이를 오가는 바다가 무척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불빛들이 명멸해 가는 싱가폴항의 야경으로 만족해야했다. 야자나무와 푸른 잔디밭, 아열대의 항구, 고층빌딩, 크레인의 숲 사이 떠오르는 붉은 아침해를 뒤로하고 배는 떠난다.
배 위에서 보내는 날들이라고 하지만 먹는 물을 빼놓고 쓰는 물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바닷물을 끓여서 담수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물은 일종의 증류수와 비슷한 성격이어서 세수를 해도 우리 집 산에서 내려오는 물처럼 개운한 맛은 떨어졌다.
목욕을 하다 거울을 봤다.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지. 하루세끼 빈둥거리며 넙죽 넙죽 받아먹었더니 그렇지 않아도 너부데데한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치와 된장국, 김 몇 장이면 전부였던 밥상이었다.
한 달에 잘하면 한 두 차례 어쩌다 고등어나 갈치 몇 토막으로 온 집안에 비린내를 풍기며 구워놓으면 세상이 부럽지 않던 그런 식사가 아니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먹을 것이 아니라 매끼니의 식탁이 잔치 상이었다. 요리 집이었다. 안되겠어. 다이어트라도 해야지. 오늘부터는 아침을 거부해야겠다.
현대하이웨이호의 제일 위 층 양쪽 윙브릿지에 설치된 온도계는 섭씨 34도를 가리키고 있다. 바다만 보였다. 싱가폴을 떠나 말레이시아를 향해 가는 말라카 해협, 바다만 바라보았다. 잘못 보았나. 푸른 바다위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물고기가 나타났다. 잘못보지 않았다. 거대한 물고기는 바로 곤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하는데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것이 변화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하며 이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새가 한번 기운을 내어 날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고 하는데 남쪽 바다란 천지를 말한다.”
장자 내편 소요유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내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물고기 곤은 다름 아닌 붕새의 날개처럼 하늘에 드리운 구름이었다. 구름이 일고 변화하여 하늘의 도화지위에 끝없이 갖가지 모습의 형상을 그려내는 풍경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혼자 심심할 때면 그런 놀이를 하곤 했다. 숨은 그림 찾기였다. 시원한 나무그늘이나 평상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라면 더 바랄게 없었다. 뭉게뭉게 요술쟁이처럼 구름이 피워 올리는 모습들에 내 마음을 투영해보는 일이었다.
거기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안타까움은 왜 없었을까. 그립고 그리운 것들이 손짓하며 너울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바다 속에 거대한 물고기를 풀어놓기도 한다는 것을 어찌 이런 항해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으랴. 눈에 담을 수 있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