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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3 |
[신귀백 영화엿보기] 신에 대한 절규 ..시티 오브 갓(2002년)
관리자(2007-03-14 11:32:03)
신귀백ㅣbutgood@hanmail.net 죽음의 테마파크 1월에 발견했대서 리우 데 자네이로라 불리는 강, 그 이름을 딴 도시 리우 근교. 강이 흘러드는 지류를 받아들이듯 여기 강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흘러든다. 비키니가 넘실대는 코파카바나 해변과 거리가 먼 이 동네는 전기도 수도도 없는 빈민가가,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도시. 닭의 목을 치는 오프닝은 쇼킹 아시아처럼 서툴지만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삶을 드러내는데 탐색전이나 소강상태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놀랍다. 그 총에 관객의 머리가 뻥 뚫린다. 나라의 보배라는 아해들이 죄의식도 없이 쏘아대는 이 총질을 성장통이라 부르면 배부른 소리. 이것은 루저의 성장드라마나 깡패의 성공담이 아니기에. 그 저개발의 기억인 60년대 ‘신시티’에는 약탈은 있어도 살인은 삼가는 나름대로의 룰이 있었다. 룰이 예외가 되고 예외는 다시 원칙이 되는 70년대, 연이나 날릴 애새끼들이 탁구를 치듯 총질을 즐긴다. 그리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코카인과 마리화나를 흡입하면서 동지가 되고 남자가 되었다고 우긴다. 살인의 토너먼트 끝에 제빼게노와 베네가 마약을 파는 전설의 악당으로 성장할 때, 영화의 나레이터 부스카페는 똑딱 카메라로 사진 찍기를 즐긴다. 이렇듯 살인이 풍경이고 총성이 코러스가 되는 죽음의 테마파크에서는 그 누구도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데, 살인과 약탈에 실패한 유일한 청소년 부스카페에게 고급 카메라가 생긴다. 그는 썩은 짐승을 먹기 위해 머리를 고기에 박는 리우의 하이에나를 찍는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판 살인의 추억 누나가 강간당해서, 집을 빼앗겨서 악당이 되던 아이들은 나름대로 이유를 갖고 살인 병기가 되어 간다. 운동화 끈도 제대로 못 맬 아이들이 리볼버 권총을 쏘아대는데, 신(神)도 신발도 없는 배고픈 아이들이 한 생애를 탕진하는 데는 불과 몇 시간이 안 걸린다. 방금 사람을 죽인 아이들은 이마빡에 피도 마르기 전에 총에 맞아 죽고 아무 데나 던져진다. 야망과 잔혹이 어린 갱들의 자기실현일진대 이들에게 민형사상 미성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러운 싸움 뒤에 있는 스폰서 무기상 뒤의 보이지 않는 손을 건든 갱들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는 아이들에게 총이 빵처럼 배급된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자 총 든 아이들의 연령은 초딩에게까지 이어지는 것. 간덩이가 부은 이 철부지들이 총포상을 털고 모두가 전쟁에 휩싸일 때, 드디어 정부가 개입을 한다. 여기 경찰과 갱단의 한 가운데 카메라를 든 부스카페는 쫓기던 닭처럼 서 있다.   ‘가난한 사람의 사진이 신문에 나오는 것은 범죄를 범했을 때에 한한다.’ 저 옛날 고리키 선생의 말씀. 실수로 게재된 악당의 사진 때문에 신문사 비정규직 사진기자가 된 부스카페는 결정적 타이밍을 잡아내는 브레송이 되어 시시각각으로 찰나와 대결하는 증인의 순간을 살아간다. 살인의 포토그라피가 잔인한 증인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사춘의 악당들은 신문에 사진이 실리는 것을 즐기는 아이러니. 이들에게 저장된 살인의 추억을 트라우마라 부른다면 그것은 사치스런 언어다. 결국 총탄의 카니발 속에 그가 잡아낸 처절한 현장사진이 1면 톱을 장식하면서 정식 사진기자가 되는 회고의 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리우 뒷골목에서 풀타임을 소화한 자, 부스카페 하나 뿐,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이것은 실화에 기초했다고…… 브라질 만다라        ‘사모아의 청소년기’가 마가렛 미드의 인류학 교과서라면 이 브라질 리포트는 파울로 린스의 동명소설이 원작. 이 끔찍한 보고서는 빈자의 사회학일 수 있고 저개발 선상의 인류학일 수 있겠지만 이런 어려운 말보다는 한마디로 브라질 판 레미제라블. 그러나 여기서 그 누구도 촛대를 주지 않는다. 다만 총을 줄 뿐. 그렇다면, 텔레비전 속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그 이쁜 히메나 선생님의 제자들이 나오는 남미의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는 뭔가 가짜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다. 왜? 예측 가능한 장면이 없기에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힘이 있다. 2005년 11월에 개봉했지만 시골 극장에는 걸리지 않은 이 날것은 설날 티비에서 해 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또한 이것은 갱영화지만 양복쟁이 갱들이 깽판치는 누아르 영화가 아니다. 그래서 장르 범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것은 쿠바 혁명의 이면을 비추던 <저개발의 기억>이 주는 시가 연기 같은 몽환이 없다. 여기는 지옥이기에 그렇다. 그런 점에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귀공자 의대생의 낭만에 불과하다. 갱영화의 대부 코폴라의 <대부>가 현악기의 유연함을 갖춘 장엄이라면 이것은 삼바 리듬과 라틴 디스코를 깐 무간지옥의 사운드의 귀로 듣는 만다라다. 하여, 나는 이 압박 만땅의 브라질 잔혹사를 권상우식으로 뱉고자 한다. “세계화, 신? 좆까라고 그래!’ 스타일리시를 넘지 못하는          다시 보았다. 흑백영화가 아니었다. 첫장이 막장인 아이들의 이야기는 초반은 컬러였다가 세피아 톤에서 다시 컬러로 바뀌었는데, 나는 왜 이 영화를 흑백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먼지 나는 황토밭 신작로 주변에 지어진 바라크 집들은 분명 황색인데도 영화 속 웃통을 드러낸 갈색 피부의 아이들이 모두 무채색으로 보였다. 또 마치 보도사진전을 보고 온 느낌, 왜일까? 총질이 일상인 이 저주받은 동화는 시시티비에 찍힌 범죄 장면으로 생각나게 하는 효과에 성공한 것이기에. 시도 때도 없이 이루지는 부감 숏 그리고 음악이 사라지면서 주위를 찬찬히 돌려대는 카메라는 피범벅 장면마다 여지없이 핸드헬드로 흔들린다. 그리고 선거유세 같은 거친 점프 컷, 분할 화면, 극단적 렌즈의 사용 이것들은 스타일리시에 머물 위험이 있다. 그래서 걸작이라 말하기에는 조금 머뭇거려진다.     그래도 상징 하나. 부스카페가 진땡 카메라를 갖게 되는 순간에 울려 퍼지던 기억나는 음악, ‘에브리 바디 워스 쿵푸 파이티잉.’ 나의 고딩시절 한참 듣던 칼 더글라스의 노래다. 이 미국 노래에 맞추어 브라질의 대가리 굵어진 10대들이 춤을 춘다. 성숙한 사회적 기반 없이 강대국 노래를 교가처럼 받아들이고 몸을 흔드는 모습. 우리 지나온 날의 표준화된 이 취향이 미필적 고의의 살인교사를 강요하던 보이지 않는 손이 누구라는 것. 그가 바로 FTA를 강요하는 ‘그’라는 것, 간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카카, 아드리아노, 호나우딩요의 경기 이력을 줄줄이 외우는 나의 아들은 주성치가 메리야스 입고 싸우던 소림축구 OST에도 나왔던 노래란다. 기특하지만 그것이 바로 강자의 표준이란 것을 모른다. 여수 출입국 관리사무소 영화를 두 번 보면서 바흐만 고바디의 영화 <거북이도 난다>가 떠올랐다. 언어가 단절되던 순간들. 이라크 국경지대 지뢰밭에서 저 어린 팔 다리 잘린 것들이 더는 길 수 조차 없을 때, 날아야 하는 이야기는 수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짠했고 눈물로 이어졌다. 어린이들의 삶터인 지뢰밭에는 사랑과 우애와 존중이 지뢰처럼 묻혀있었으나 브라질 아이들의 상처와 진물은 화농으로 발전될 뿐, 딱정이가 앉질 않는다. 이 신이 외면하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무규칙 이종 총격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공공의 적이 되기에 측은지심의 발동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전에 본 브라질 영화 <중앙역>은 똑 같이 가난한 리우 데 자네이로 사람들의 편지를 써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거기의 따뜻한 체온이나 희망이 읽히질 않아 안타깝다. 음, '고요한 이피랑가의 강변에서' 라는 브라질 국가(國歌)는 애국에 대한 강요보다는 지구의 허파로 불리우는 웅대한 원시림을 노래한다던데…… 악마는 가난한 집에 두 번 찾아간다던가. 과연 악마가 찾아가는 곳은 커피 콜로니제이션의 동네, 여기뿐인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왔다가 여수에서 불에 타죽은 아시아인들은 신의 도시 사람들은 아니런가. 리우 하꼬방 소년들이 다음 죽음은 내 차례라고 믿듯, 그 다음 죽음이 자기차례라고 믿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단속 다음은 감금 그리고 추방 아니면 죽음이라는 공식일진대, 시장의 단일화를 위해 죽자사자 달려가는 이 대한민국을 신이 지키는 나라라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안타깝다. 잠깐! 짧은 브라질 영화사 ‘시네마 노보’ 또는 ‘고통의 촬영술’ 도스 산토스의 <리우 40도(1955)>가 브라질 영화사의 열매 ‘시네마 노보’의 씨앗. 그는 축구장과 관광객이 바라보는 대도시 리우의 뒷골목, 아름다운 농촌의 비참한 가난 등 브라질 영화에는 등장한 적이 없었던 민중의 삶을 담는다.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처럼 독립 제작, 비전문 배우의 기용, 스튜디오가 아닌 실제 현장에서의 촬영 등 일상의 생활 모습을 담은 다큐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 할리웃 스타일과 다른 재미없는 영화일 것은 뻔한 이치. 쿠바혁명의 민족주의가 한창인 1960년대, ‘새로운 영화는 가난한 민중을 배제하면 안 된다’는 모토가 브라질 리얼리즘 영화운동인 ‘시네마 노보’를 밀고 간다. ‘배고픔의 미학’ 또는 ‘고통의 촬영술’이란 이론 덕에 브라질은 제 3세계 영화의 지도적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글로베르 로샤의 <검은 신, 하얀 악마(1964)>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혁명적 절규, 민족주의와 양식화된 의식의 결합, 폭력과 광란의 표현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군부독재가 시작되면서 이 영화운동은 빛을 잃는다. 하지만 한참의 세월 뒤, ‘고통의 촬영술’ 냄새가 풍기는 그 실천물 <시티오브갓>으로 브라질 영화는 세계의 영화평단에 충격을 던진다. 이 골 때리는 영화는 2004년 감독, 촬영, 편집, 각색 등 아카데미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상은 없었다. 리얼리즘에 기반한 정극 <중앙역>이 잘 알려진 브라질 영화 그리고 <거미 여인의 키스(1985)>는 미국과 브라질이 공동제작한 영화이고 1997년 베니스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바람의 전설>은 환상적 리얼리즘의 남미 스타일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 ‘여인의 음모’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나온 영화 <브라질>은 영국 영화이고 브라질과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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