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7.3 |
[문화시평 ] 역사 만들기 혹은 새로운 미술문화 만들어 나가기
관리자(2007-03-14 11:25:34)
역사 만들기 혹은 새로운 미술문화 만들어 나가기.....도립미술관 ‘2006년 신소장품전’을 보고 이영욱ㅣ전주대 도시환경미술학과 교수 전북 도립미술관이 신소장품전을 열었다. 미술관의 소장품전은 통상 두 가지 점에서 흥미를 끈다. 하나는 수집된 작품들을 통해 해당 미술관의 운영방향이랄까 미래랄까 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수집품들이 대체로 엄선된 것들인 만큼 작가들의 진면목이나 예상치 않던 새로운 면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 또한 이러한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전시에는 총 147점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지역작가 혹은 지역 연고 작가들의 작품이었고, 그 밖에 기획전을 통해 수집된 외국 작가의 작품이나 여타 작가들의 작품이 몇몇 있었다. 미술관 설립이 3년여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지역의 미술사를 반영하는 컬렉션을 우선적으로 갖추려는 미술관의 의지가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미술관으로서는 지역미술관으로서의 정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전 1회 소장전에서 주로 근현대 서화들이 수집되어 선보였던 것과는 달리 좀 더 동시대에 가까워진 수집방향이 나타난 것도 이러한 의지가 수순을 밟아가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느껴진다.   또 하나 눈에 띤 것은 소장을 위한 작품 선택이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해당 작가의 최상의 질을 갖춘 작품들이 많았고, 대표작들이 충실하게 선택되어 오랜만에 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도립미술관이 지역작가의 질적으로 우수한 대표작들을 소장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상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작품이 이미 판매되어 없거나 망실되곤 하여 작가도 자신의 대표 작품들을 소장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고, 가끔은 예산이 받쳐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정도의 선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미술관 측의 적지 않은 노력이 있었음을 확인해 주며, 이를 치하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나를 즐겁게 했던 작품은 무엇보다도 창암(蒼巖) 이삼만의 [해서(楷書)]였다. 미술이론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실은 나 자신 서예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하지만 글의 의미를 온전히 읽어내지 못하는 수준에서도 한 획 한 획, 한 글자 글자마다 느껴지는 힘과 리듬감이 화면 전체로 확산되어 명증한 어울림을 이루어내는 것이 그야말로 인상적이었다. 명품의 위력을 만끽할 수 있는 사례였다는 생각이다. 정승섭의 [추성(秋聲)]이나 이성재의 [출하(出荷)]는 상대적으로 작가의 젊은 시절의 작업들이라 나로서는 실물로 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들이었다. [추성]의 성실하면서도 차분한 붓질에서 나온 가을 산사의 고요히 생동하는 이미지와 [출하]의 세밀하고도 정감 있는 상황 묘사는 지금으로부터 2-30여 년 전 작품들이 지녔던 강점과 매력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준 기회였다. 작고작가나 원로 혹은 중견 작가들 말고도 청년작가들의 작품들이 여럿 제시된 것 또한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수집이 역사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술이 창출되는 현장에까지 관심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긴 무슨 원론적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현재 물심양면으로 어려운 전북 미술계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도립미술관이 현장의 젊은 작가를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작품 소장에 적극 나서야할 상황이다. 하지만 수집과 소장 자체가 단지 작품에 대한 사후적 승인 행위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미술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강력한 기제이자 수단의 하나라는 점이 중요하다. 미술관은 불가피하게 나름의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선택을 계속할 수밖에 없으며, 가치지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지향이 인정을 받을 수 있으려면 역시 만만치 않은 안목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현장의 젊은 작가들의 전시와 활동들을 거의 빠짐없이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 하며, 그 작업들에 대한 나름의 관찰과 평가를 지속해야 한다. 하긴 이러한 일을 전적으로 미술관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비평이 부재한 가운데 가치평가의 객관적 체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지방 화단에서 이러한 어려움은 일정 정도 불가피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장과 관련한 여러 가지 불편한 뒷말이 생겨날 수도 있다. 결국 문제는 미술관 내부에 수집과 소장을 관련하여 좀 더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평가 체계를 갖추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청년 작가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승호의 [유묵-풍(流墨-風)]이 눈에 띠었다. 버들가지들의 흔들림을 수묵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한국화의 전통이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서도 계속 창신(創新)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나 더 작품에 대해 언급할 것이 있다.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왕지엔루라는 작가의 [심미의 자성]이라는 제목의 중국 판화였다. “중국미술의 오늘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을 구입한 것이라고 하는데, 기법적으로 완벽했을 뿐 아니라 그림이 제시하는 이미지의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마네킹을 재현한 이 작업은 그 이미지에 잠재된 외상의 흔적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일상적 세계상을 파괴하는 듯하다.         미술관의 수집방향과 관련하여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사실 특정 미술관에 대해 “어떤 작품들을 수집, 소장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 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도출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개인이 설립한 미술관이라면 그야말로 설립자의 취향과 해석에 따라 작품들을 수집, 소장하면 될 것이요, 무슨 아프리카 미술관이니 수채화 미술관이니 하는 식의 해당 미술관의 미션에 대한 선규정이 있는 경우에도 난점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도립미술관이니 시립미술관이니 현대미술관과 같이 좀 더 일반적이고 공공적인 성격을 띠는 미술관의 경우 어려움은 훨씬 배가된다. 그 까닭은 그러한 미술관들이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미술관의 작품이나 자료 수집 활동이 공공적이며 객관적인가에 대해 시민들이나 이해당사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문제제기가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사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미술관의 개념 자체가 오늘날 심대한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서구에서는 모던(근대) 미술관의 이념이 근본적인 비판에 처해 포스트모던 미술관으로의 이행이 진행되고 있다. 흔히 모던 미술관은 작품과 외부 사회의 연관을 배제하고 세속적인 요구와는 분리된 미의 성소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여기서 작품은 순수의 표상으로 신격화되고 작가는 신화화 된다. 하지만 지난 이 삼십년간 서구에서는 이러한 모던 미술관이 실은 미술 자체를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무덤에 가까울 뿐 아니라, 그 이념 또한 작품의 시장 가치를 보장하는 동시에 세속적 욕망을 숨기기 위한 역설적인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결국 미술관이란 한 시대의 주류세력과 공모하여 주류문화를 만들어내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모던 미술관의 신화화로부터 벗어나 미술관에 세속적인 것을 도입하려는 시도들을 통해 포스트모던 미술관이 등장했다. 하긴 서구의 경험이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될 것은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미술관의 소장과 전시의 관행이 우리의 경우 일본과 서구를 통해 유입된 체제를 그대로 답습해 온 것도 사실이며, 우리 나름으로 이러한 미술관의 역기능을 탈피하려는 시도도 중요하다.       원칙은 원칙이요, 문제는 항상 현실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 물론 현실과는 크나큰 낙차를 가질 수밖에 없는 원칙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두에 두면서 슬기롭게 운용을 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도립미술관에 따르면 소장품 수집 노선은 지역미술의 정체성 추구, 미술의 보편성 추구, 환경미술품 설치, 대중 참여형 작품 수집의 4가지로 되어있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노선이 미술품 소장과 관련하여 위에 논의된 여러 복합적인 문맥을 고려하는 동시에 비교적 현실적이며 안정적인 운용의 규칙들을 세워놓은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수집 방향과 관련해서는 ‘2005년부터 2006년의 경우 산일되어가는 작고 작가의 서화를 우선 수집하고 컬렉션의 기본 틀을 갖춘 후 점차 생존 작가 작품을 필두로 사진 공예 기타 장르를 포괄하는 수집을 본격화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앞서 필자가 확인한 바 있는 수집 방향이다. 결국 문제는 실제 실행을 적절히 해나가는 것인데, 이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일단은 미술관 내의 수집위원회를 좀 더 전문적, 객관적으로 운용하여 해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노선과 방향 그리고 실제 실행과 관련하여 몇 가지 나의 의견을 보태기로 하겠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역 작가들의 작품의 소장과 수집방향이 좀 더 정교화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의 미술사 연구 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에서 지역 작가들의 작품 수집은 자칫하면 평면적인 수집에 그치거나 불필요한 반목을 일으킬 여지가 많다. 앞으로도 지역 작가들의 작품 수집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텐데, 크게 보아 지역의 미술에 대한 연구가 매우 부족하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연구가 없이는 적절한 수집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재의 미술관의 여건으로는 쉽지 않겠지만 지역미술에 대한 연구 기능을 보강할 것을 권하고 싶다. 두 번째로는 여타 지역에 기반을 둔 작가들의 혹은 외국 작가들의 수집 원칙에 대해서도 일정 정도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대체로 이들 작품들은 현재 기획전을 통해 구입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컬렉션 자체가 나름의 방향을 형성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모든 것이 방향을 잡아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컬렉션이 난삽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은 피해야 한다. 이는 물론 쉽지 않은 주문이며, 당장은 해답이 나오기 힘든 주문이다. 미술관 뿐 아니라 관련 전문가들의 고민과 연구가 좀 더 필요한 부분이다. 세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지적했지만 청년 작가들의 작품 수집을 위해 좀 더 노력을 경주해 달라는 것이다. 미술관이 젊은 작가들을 작품 구입을 통해 격려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미묘한 일이기도 하며, 적극적인 평가 행위로서 영향력이 큰 활동이다. 미술관 나름의 규칙을 세워 작품 구입의 방향이 좀더 가시화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네 번째로는 이미 도립미술관 자체의 수집방향에서 언급된 바 있지만 사진, 공예, 건축, 디자인 등의 순수영역에 속하지 않는 장르들 혹은 설치미술 등의 기존의 개념에서 탈피한 작업들이나 시민들의 일상에서 나오는 이미지 자료 등 확대된 미술개념에서 바라본 작업들에도 좀 더 주목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는 ‘순수’라는 용어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 대체로 소장품전이 현재까지는 기존의 회화-조각 개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뭐 하는 일도 없이 지나치게 주문이 많은 듯싶다. 나름대로 미술관 측에서도 이런 저런 사항들을 다 고려하고는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규칙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과정인 하나하나의 작품 선정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번 전시가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점에서 미술관의 노고가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북의 미술계는 아니 지역미술 자체가 다들 알고 있지만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다. 도립미술관이 지역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도립미술관이 창의적인 노력으로 지역의 미술문화가 꽃피울 수 있는 전망을 여는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다해 주기를 기대한다. -------------------- 이영욱/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한국미학회 예술과 사회분과 분과장, 한국현대미술사학회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전주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현대미술사학회 학술간사, 문예미학회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