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
천고마비
관리자(2006-10-14 10:47:20)
천고마비
글 | 정항석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
해마다 오는 가을에 푸르디푸른 하늘을 쳐다보노라면 천고마비(天高馬肥)를 외치고 자연을 음미하게 만든다. 따스한 햇살에 곡식이 여물고 산천이 곱게 물들어 갈 즈음 풍요로운 수확을 앞두고 괜스레 마음을 넉넉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글자만을 놓고 해석할 경우, 천고마비는 ‘하늘이 높다는 것은 가을이 되었음을 알리고 먹을 것이 풍족하여 말이 살찐다’는 뜻이다. 과연, 그 원천에서 천고마비는 넉넉함과 풍요로움을 담고 있었던 것인가?
언어의 표현에도 절대적 가치와 상대적 가치가 있다.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 중에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천고마비도 여기에 해당된다. 오래전 중원에서 동이족으로 알려진 동호(東胡)와 흉노(匈奴)가 쟁탈전을 벌이던 동북아의 고대사를 살펴보면 천고마비는 한족(漢族)의 가슴에 한(恨)맺힌 글귀가 된다.
중국하면 먼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꼽을 것이다. 서기전부터 축곽(築郭)한 이 성곽은 길기도 길고 크기도 크지만, 북방의 기마민족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말하자면 동호와 흉노 같은 고래가 각축을 벌이면서 한나라와 같은 주변 세력들의 새우 등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흉노의 모돈(冒頓, 읽기는 모돌)이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아니 된 한의 유방(劉邦)을 제어하기 위해 출격한다. <전한서(前漢書)>의 고제기(高帝紀)에는 이러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匈奴共距漢...士卒墮指者什二三...爲匈奴所圍七日...陳平使畵工圖美女...得其土地非能也...於是
匈奴開其角得突出...
흉노도 같이 한을 공격하니 병사들의 열명 중 둘 셋의 손가락이 얼어 떨어지고 흉노로부터 칠일동안 포위되었다. 진평이 미인도를 그려 보내어 어떤 미인을 보낼까를 알리고 한이 차지한 땅이라야 얼마 되지도 않지만 이를 제대로 추스를 역량이 못된고 이르니 이에 한쪽의 포위망을 풀어 주었다.
한의 정통사서 <전한서>는 흉노이외에 다른 세력도 한을 괴롭혔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위 문헌에 따르면 싸웠다는 표현보다는 ‘가지고 놀았다’과 할 만큼 이들의 국력차이는 매우 차이가 났다. 한의 유방을 둘러싸며 괴롭혔던 이들이 포위망을 풀어주었던 것은 단지 미인을 공녀로 보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의 역량을 염두에 둘 만큼도 아닌 상황에서 중원의 패권을 다투던 동호(東胡)가 더 큰 문제이었던 까닭이다. 이로서 한나라는 지속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흉노와 한으로 돌리면, 이들의 역학관계에 관하여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흉노전(匈奴傳)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於是漢患之高帝乃使劉敬奉宗室女公主爲單于閼氏歲奉匈奴絮繪酒米食物各有數約爲昆弟以和親冒頓少止
‘이때야 한나라 근심하매 고제가 유경을 사신으로 보내어 한나라의 종실 중에서 공주를 선발하고 선우(單于)에게 알씨(閼氏, 애기씨, 아가씨)를 받치게 하였다. 해마나 솜, 비단, 술, 쌀, 각종 음식물을 올리고 형제의 관계를 맺고서야 조금 줄어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한 발을 물러서서 북방을 주무대로 살던 이들과 남방으로부터 올라오던 이들 사이에 벌이던 삶의 방식에 관한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만남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실, 중원에서 강력한 힘을 행사하던 동이기마족에게도 나름대로 삶의 어려움은 있었다. 대체로 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목축과 유목을 매개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충분한 육류만큼이나 채소가 부족했다. 말하자면 삼겹살에 상추나 깻잎이 있어야 제 맛이 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동이기마족은 필요한 야채를 농경민족에게서 찾았다. 이것이 잘못된 만남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물물교환으로 고기와 채소를 바꾸었겠지만, 점차 따지는 농경민족의 특성이 닿은 대로 듬븍 듬븍 주는 기마민족의 눈에 거슬렸다. 딱히 정해진 거래기준도 없거니와 저울질하여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는 것은 기마민족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이곳에는 콩을 심고 저곳에는 감자를 심고, 이달에는 보리를 심고 다음 달에는 벼를 심자’는 식으로 매우 꼼꼼하게 절기를 계산하는 농경민족이다. 거칠고 계산적이지 못한 이들에게 처음부터 정상적인 상업거래는 기대할 수 없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목초지가 다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들에게 거친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지만 따지는 거래는 어울리지 않았다.
성격이 급한 이들은 대충의 교환방식을 선호했고 이를 내켜하지 않는 농경족과의 마찰은 불가피하였다. 처음 얼마라도 육류를 내주었던 것이 점차 약육강식의 법칙을 십분 발휘하더니 그냥 달라고 하였고, 이젠 아예 가지고 와서 바치라고 하였다. 큰 소리 한번 치면 물러설 것 같은 농경족에게 더 이상의 거래를 허용하지 않았다. 여름 내내 농사를 지어놓으면 추수기에 기마민족이 다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여자(貢女)까지 요구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어째서 천고마비가 우리에게는 결실이고 한족에게는 피 맺힌 것이던가? ‘뺏기는 이들과 빼앗는 이들’사이에서 같은 글자가 달리 사용된 것이다. 우리에게 천고마비는 수확을 상징하지만 지나족(支那族)에게는 빼앗김을 의미하는 비극이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알려주는 시가 전해져 오고 있다. 많은 화번공주 중에서도 한나라의 9번째 왕이었던 원제(元帝, B.C. 48~33)의 후궁이며, 월나라 서시(西施), 한나라 초선(貂蟬), 당나라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4대 미녀로 알려진 왕소군(王昭君)이 공녀로 팔려가던 애끊은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昭君怨 (왕소군이 군주를 원망하며)
漢道方全盛 바야흐로 한나라도 전성기에 들어섰고
朝廷足武臣 조정에는 무신들도 많다고 들었건만
何須薄命妾 어찌 하야, 박복한 나로 하여금
辛苦事和親 쓰디쓴 화친하는 일을 맡기었는가!
昭君拂玉鞍 내, 안장의 먼지를 쓸어내고
上馬啼紅頰 말에 오르려니 붉은 뺨에 눈물만이 흐르는구나!
今日漢宮人 오늘은 한의 사람이나
明朝胡地妾 내일은 호지(胡地)의 첩이로구나!
唵淚辭丹鳳 눈물 숨기고 단봉궁을 하직하고
舍悲向白龍 슬픔 머금어 백룡궁을 향하노라
單于浪驚喜 선우(동이족 임금의 옛칭호)는 희희낙락 좋아하겠지만
無復舊時容 다시는 친정에 오지 못하겠구나
萬里邊城遠 만리변성은 멀기도 멀고
千山行路難 천산 가는 길은 험하기도 험하구나.
擧頭惟見日 고개 들어도 보이는 건 오직 태양뿐이니
何處是長安 내 살던 장안은 어디이런가?
胡地無花草 호지에 화초도 없어
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몸은 야위어 허리띠 느슨해지는데
非是爲腰身 어찌 선우의 사랑을 바랄 수 있는가.
위 시는 당(唐)나라 시대 수작만 모았다고 하는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전하고 있다. 당의 황실에서 왕소군을 보내고서야 한이 유지되었던 일을 새기기 위해 당대의 시인 이백과 동방규로 하여금 정리하게 했을만큼 사뭇쳤던 것이다.
전한(前漢)의 왕소군에서 후한(後漢)의 채문희에 이르기까지 꽤나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화번공주에 관한 기록을 보면 동이족과 한족의 수직적 관계가 매우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세상을 통일했다던 한나라가 겨우 이 정도이었다. 귀하디귀한 한나라의 옹주와 공주를 알씨(閼氏)로 바쳐야 국가가 존립했던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농사도 지어 바치고 게다가 공녀까지 올려야 하는 기마민족과 농경한족의 관계는 이러하였다. 일년 농사를 공물로써 받치고 게다가 공녀까지 받쳐져야 하는 화번공주들의 이야기는 한족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채 용서할 수도 용서해서도 아니 되는 뼈에 사무친 일이었던 것이다.
지렁이도 밝으면 꿈틀거리는 것처럼, 이들은 억울한 계산을 마음에 새기고만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리 해도 뺏기도, 저리 해도 뺏기니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결사항쟁을 외치게 된다. 이라크가 미국에게 깝죽거렸던 적은 있어도 미국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보는 이들은 없었던 것처럼, 당대의 패권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불가하지만, 일년 농사를 고스란히 빼길 수 없다고 느낀 이들은 높디높은 하늘(天高)이 되어 가을이 오면 원망스럽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병장기(馬)를 튼튼히 대비(對備)할 수밖에 없었다. 국방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던 절박한 심정에서 성을 높이 쌓고 말을 튼튼하게 하였다.
천고마비는 한족에게 이렇게 태동하였다. 당시 한족은 영토보다는 영향력 확산에 주력하였던 동이족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낮 약소세력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동력과 순발력에서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다툼을 견주는 것은 무리이다. 이들의 역학관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이치는 매정한 법이다. 약하다고 동정을 보내는 것은 속세의 법칙이 아닌 까닭이다. 약하면 약한 대로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처럼 이들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로 매어 있었다.
혹 흉노가 한민족과 직접적 조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동이의 범위가 크고 동이는 특정 민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 연맹체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전혀 무관하지 않다. 백제인들의 일부가 왜(倭)로 가서 왕조를 일궜다고 해서 백제와 일본왕실을 별개의 것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게다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나(支那)의 사서들은 이들의 활동내용을 같이 묶여 서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반도에 살고 있던 시기이후로만 한민족을 국한해버리면 한반도이외에서의 선조들의 기개를 스스로 져버리는 것이 된다.
흉노 때문에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 했던 게르만족 독일은 흉노의 시원(始原)을 한민족에게서 찾고 있다. 독일의 국영방송은 칭기즈칸보다 800년 앞서 유럽을 침공한 훈족 왕 아틸라를 방영하면서 그들이 한민족과 깊은 연계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기대된다.
이 사실을 고대 사가들이 모르고 있지 않았을 것인데 무엇을 감추고자 하였단 말인가? 이러한 사실은 단지 약육강식의 법칙만을 확인시키는 것은 아니다. 위 시는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역학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몇 가지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다. 첫째, 우리가 알고 있는 한(漢)나라의 대한 오류(誤謬)이다. 이때가 B.C. 200을 전후로 하고 있는 바, 제 몸 하나 추스르지도 못하거늘 한사군과 같은 제후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끝난 이야기이었다고는 하지만 억측이었던 것이다. 둘째, 한족은 동이족에 대한 열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소군원>에서는 한나라의 궁전을 단봉궁(丹鳳宮)으로 표현하고 있고, 동이족이 사는 궁전을 백룡궁(白龍宮)이라 칭하고 있다. 동이족의 전통색깔이 흰색이었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양사상에서 용봉(龍鳳)에서 굳이 우열을 따지자면 용(龍)이 봉(鳳)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셋째,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즉 평화를 위한 대비를 하지 못하면 결국 공녀를 포함해서 갖은 곡식, 비단, 술 등 받치는 굴욕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 왕소군의 시(詩)는 약소민족의 비운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통한을 잊지 말라고 왕소군의 무덤이 열개도 넘는다 하니, 천고마비의 사무침을 어찌 이를 수 있을까!
<소군원>은 당나라 황실이 당대 최고묵객 이태백에게 왕소군의 시를 정리하라고 시킬 만큼 통절함을 실고 있다. 왜 그토록 당나라 최고의 영웅 당태종이 한 눈을 잃으면서까지 고구려에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역설하거니와, 중원을 주무대로 호령하며 기상을 한껏 발휘하였던 선조들의 기개가 있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좁디좁은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간혹 터져 나오는 주변의 소리에 신경질적인 반응 못지않게 반성해야 할 일은 만연하여 곪은 패배의식을 제거하는 일이다. 대륙과 열도(列島) 사이에서 나약한 반도사관에서 벗어나는 일은 영토 중심적 사고가 아니라 사상 중심적 사고에서 그 원천을 두어야 한다. 쓴웃음을 짓게 하고 있지만, 영토를 기반으로 과거의 역사를 가늠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以手遮陽)과 같다. 동북공정과 같이 고구려 유물이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 있으니 중국의 것이라고 우겨야 한다면, 미국 건국이전에 발견되는 모든 아메리카 유물은 미국의 역사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요 근래의 것만 보고 서술한 국외의 허술한 역사관을 탓할 건만은 아니다. 반도는 주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곧 떠나갈 곳처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살 수 없다.
허언과 왜곡이 진실이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묵히고 곪은 것도 살이 될 수도 없다. ‘천고마비’와 왕소군의 눈물은 평화는 준비한 자의 달콤한 휴식이며 허약하고 나약한 식민사관에서는 벗어나 진취적 기상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일어준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면 높은 벽공(碧空)이 보이는 이 천고마비의 계절에 수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