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
[도립미술관] 새로운 미술과 새로운 미술가의 역할
관리자(2006-10-14 10:40:58)
글 | 최효준 전북도립미술관 관장
오늘날 위기를 맞은 기초예술의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긴급 수혈과 같은 지원책 확대 외에는 뾰족한 대책은 없는 듯하다. 한없이 가벼워지는 대중들의 취향을 문제 삼던 시대는 지나고 이제는 그것에 영합할 궁리를 하여야 한다.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술관, 박물관, 연주회장에 관람객과 청중이 ‘충분히’ 많이 오지 않는다. 그것을 문화의 천민화(賤民化), 비속화(卑俗化) 탓으로 돌리곤 한다. 그런데 문화의 천민화와 비속화는 기초예술 침체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악순환은 오늘도 이어진다.
오늘날 현대인의 심미적 욕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높고 대중들은 그것을 여러 형태와 방법으로 충족시키고 있다. 세련미와 감각, 감식안도 보통이 아니다. 거부감 없이 성형을 하고, 옷을 입을 때 ‘코디’를 일상화 하고, 흥미로운 영화에 천 수백만의 관람객이 몰리고, MP3가 젊은 층의 필수품이 되는 현상 등은 오늘날 한껏 드높아진 대중의 심미적 욕구의 수위를 말해 준다. 도대체 이들 대중에게 기초예술, 순수예술의 참 맛을 체감하게 해주고 그것에 길들여지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불가(佛家)의 화두(話頭)와 같은 것이 되었다.
오늘날의 작가, 기획자, 향수자는 “예술이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는 수단이다”라는 대전제를 ‘엄숙주의’의 잔재로 타기하거나 그러한 추구를 포기하게 만드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오늘날의 예술가 어느 누구도, 생전에 비록 그림 한점만을 팔았지만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던 반 고흐처럼 살 수는 없다. 루벤스의 명작을 한 번 보려는 비원을 이루자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 가면서도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던『플랑다스의 개』의 네로는 오늘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버거운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신을 고양시키기보다 중독성이 있는 행위에 몰입한다. 전국이 도박장이되는 이러한 흐름에 국가마저도 편승하거나 현실을 방조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는 ‘네오 팝(Neo Pop)’이라고 할 수 있는 흐름이 풍미한다. 엄숙하지 않고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유쾌하며 부담이 없으면서 슬쩍 무언가 심오한 의미를 내비치는듯한, 모호하고 기발하며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일상적으로 받아들였던 현실 대상을 낯설게 하거나 재발견하게 만드는, 의외성은 기본이고 충격을 주되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미술이다. 미술은 이제 기발한 아이디어를 불가의 화두(話頭)처럼 심오함과 난해함으로 포장하고 호도하여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게임, ‘시각적(視覺的) 화두’의 게임이 된 듯하다. 그런 작품들이 넘쳐나는 오늘날 그런 풍이 아닌 경우 미술계 주류에서 인정과 평가의 대상이 되기를 포기해야 한다. 이러한 추세는 유수 미술 비엔날레 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되지 못하고 또 다른 의미의 획일화의 폐단이 드러나는 것이다.
인류가 처한 사회문화적 조건은 빠른 속도로 각박해져 간다. 도시 중심 무한 성장 기조의 현대 문명은 제동기 없는 탈것의 질주와 같아 보인다. 작가들은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통찰로 이러한 문제들에 천착하고 발언 한다. 문제는 그 발언의 진정성이다. 참 선승(禪僧)이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정진할 때 붙들고 참구하여 깨달음으로 이끄는 화두(話頭)와, 겉모습만 같은 의사(疑似) 도승이 보란 듯이 내미는 무늬만 같은 의사(疑似) 화두를 구별하기 어렵다.
수년전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10살 정도의 여자 아이들 여럿이 함께 걸어가며 비명을 지르는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높고 큰 비명을 번갈아 지르며 히히덕거리고 무척 재미있어 하였다. 비명은 죽살이치는 상황에서 공포심을 극복하고 상황에 대처하며, 위협적인 대상에게 대응도 하며, 주변의 도움도 청하는, 비계획적이되 효과적인 소통 수단이다. 아니 어떤 상황에서는 비명밖에 지를 수 없다.
현대 미술은 절박한 현대의 인간 조건을 표현하고자 마치 비명처럼 던져지곤 한다. 문제는 이것이 어떤 복잡하고 은밀한 룰에 의해 돌아가는 일종의 고난도 게임, 아이디어 겨루기, 시각 관련 유희가 되었다는 점이다. 마치 어린 여자 아이들이 비명을 어떻게 날카롭게, 절박하게, 강렬하게, 그러면서도 멋있게 지를 수 있나 유희를 하듯이…. 그런데 그것은 비명이되 이미 비명이 아니다. 비명 아닌 비명이 난무하는 시대, 이 시대에 미술에 대한 가장 무난하고 안전한 찬사는 “참 재미 있네요”이다.
미술이 현실 문제를 건드리고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비판하고 풍자하고 야유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현실과 적정한 거리를 두곤 한다.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현실적 효과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현실은 일종의 장식이 된다. 여기서 현실과 예술의 간극(間隙)이 생기고 대중과 미술의 거리가 생긴다. 일상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을 약간 가미하여 관람객을 참여시키면 대중과의 간극이 메워지는 것으로 자위한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이라는 드라마가 차고 넘치는데, 전시장이라는 무균 표본실과 같은 공간에 좀 새로운 어법과 기발한 착상으로 현실 문제를 ‘건드리는 듯한’ 판을 벌여 놓으면 비평가는, “작가는 이러저러한 현실에 대해 통렬하게 문제를 던진다”라고 틀에 박힌 추인 도장을 찍어준다. 다소 어안이 벙벙한 일반 관람객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에 나오는 어린이 짝이 나지 않으려 슬그머니 피해간다.
충분하지 않은 여건에서 수도권과 떨어진 지역에서 미술관을 3년 남짓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다. “예술은, 미술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는 본연의 기능을 갖는다.” “진선미(眞善美)가 서로 통하므로 순수 미(美)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은 그 자체로서 참되고 또 선한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라는 18세기 이래의 명제는 종전과 같은 독선적 지위를 상실해 가고 있다." "갈수록 순수미술과 참여 미술의 구분이 무의미해져 가고 있다.”
지난 7월, 인터넷 명화(名畵) 소개 사이트에 이미지와 글이 하나 올라왔다. 11세기 영국의 영주가 영지의 농노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부과하여 원성을 샀는데 16세 된 고다이버라는 이름의 새 신부가 감세해줄 것을 간곡히 청하자 영주는 “네가 발가벗은 채 말을 타고 영지를 돌아 농노 사랑을 몸으로 보여준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말한 일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10월 하순, 이 내용에 대한 조회수가 120만 건을 넘어섰다.
더 대중적인 소재에 비하면 반응이 별 것 아닌지 몰라도 한 점의 미술작품에 대한 반응이 이 정도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미지만으로는 그저 흥미롭게 느꼈을 경우가 이야기를 통해 ‘감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인 이중섭과 천경자의 경우도 그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대중성을 얻는데 큰 역할을 했듯이 미술 소통에 있어 ‘이야기’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도립미술관은 지난 2년의 운영 기간 중에, 우리 감각을 넘어 우리 정신에 작용하는 미술, 우리 삶의 질 향상이나 사회문화적인 환경의 개선에 복무하고 순수와 참여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미술,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삶의 패턴을 바꾸게 해줄 수 있는 미술, 그런 미술을 전시를 통해 제시해 보고자 하였다.
개관전이었던 <엄뫼·모악>전도 ‘이야기’가 있는 전시였고, 지난 8월-9월 간에 열렸던 <독섬??독도>전과 <독도 진경>전도 그 한 예이다. 우리 지역 30여분의 작가들이 독도 현지를 답사하였고 대부분 벅찬 감동을 안고 돌아와 그것을 화폭에 옮겼고 타 지역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많은 관람객들이 독도라는 하나의 대상을 이렇게 다양하고 개성있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 보다 심화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수십 점의 관련 보조 전시물이 걸렸고, 다섯 개의 영상 프로그램이 돌아갔고, 가용한 양을 거의 망라한 독도 관련 서적, 연구집, 발간물, 도록, 기사와 인터넷 게시물 스크랩 등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었다. 이것은 여느 순수 미술전시와는 사뭇 달랐다. 그 덕으로 노소 불문하고 관람객들은, 적어도 ‘독도’ 명칭이 ‘독섬’이라는 전라도 방언에서 유래되었고, 독도 아래 깊은 바다에 개마고원보다 더 큰 분지가 있어 거기에 엄청난 양의 자원이 매장되었으며, 안용복과 홍순칠의 활약의 의미가 무엇이라는 사실 등을 알고 돌아갔다. 쉽고 재미있고 자연스럽게 미술에 접하고 미술에 노출되면서 중심 이슈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미술의 기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이러한 ‘순수하지 않은 전시’를 통해 바라던 바였다.
지난 5월-6월 간에 열었던 다큐멘터리 사진전의 경우도 같은 맥락이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는 다큐멘터리 사진계의 전설적인 존재인데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그의 전시는 한산하기만 하였다. 주제가 무거웠던 탓이었을 것이다. 고심 끝에 살가도의 <절망에서 희망으로>전과 동시에 <슬픈 눈 맑은 영혼, 내일을 열다>라는 제목으로 김중만, 성남훈의 2인전을 함께 구성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흥미로움을 더하고, 세계적인 구호단체 월드비전을 참여시켜 실제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자료전을 함께 열었다.
가족사진 촬영 서비스와 월드비전 구호 헌금을 연결시켜 큰 호응을 얻었고, 탤런트 김혜자씨는 아프리카 출국 하루 전에 전주에 내려와 여러 행사를 통해 도민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홍보에 도움을 주었다. 많은 관람객들은 적어도 우리의 삶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풍요로운가하는 점과 그것에 안주해서만은 안 되겠고 지구촌 전체 상황에 관한 바른 인식과 더해진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을 자각했다는 고백을 해주었다.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다큐멘터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미래를 그 분야에 투영해보기도 했다.
전북도립미술관은 앞으로도 이러한 맥락의 전시를 꾸준히 기획하려한다. 한(恨) 서린 역사를 간직한 지리산을 테마로 한 학제적(學際的)인 전시, 독도전 이후 많은 작가들이 ‘한번 하자’고 말들 하시는 백두산 테마 전시, 우리 지역의 ‘마을 만들기’, ‘도시 살리기’를 테마로 한 전시 등 많을 것이다. 전시는 한 분야일 뿐이다. 이 시각문화의 시대에 사회문화예술교육의 장에서 미술의 역할은 날이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대안공간 ‘싹’의 운영은 좋은 모범사례이다. 이제 미술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현실을 나아지게 하는 수단으로 복무할 수 있다. 이는 ‘현실주의’ 작가들의 전유 분야가 아니다. ‘순수한’ 미술도 세상을 바꾸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분투하는 청년 작가들이 고민을 나누며 전환기의 시대에 새로운 미술의 역할, 새로운 미술가의 역할을 함께 창출해 갈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