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
종말의 바보
관리자(2006-10-14 10:30:27)
나는 왜 가슴 따뜻하게 읽어나가던 이 소설의 뒷맛이 씁쓸했을까 『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글| 이휘연 KBS 전주방송국 PD
영혼의 세탁소
기차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의 화장실에 들러본 남자들이라면(혹은 여자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소변기 앞에서 볼일을 보려할 때 눈앞에 아른거리는 문구들. “오늘 아침, 엄마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로 시작했다가 몇 줄 지난 다음의 맨 끝자락에는 “엄마와 나는 아무 말 없이 가슴 따뜻하게 포옹했습니다….”로 마무리되는 월간지 ‘좋은 생각’의 발췌문들. 오금을 저리게 했던 암모니아성 액체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순간과 동시에 내 오감을 자극하는 그 화해의 메시지들을 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은 배설의 쾌감 대신 가슴 따뜻한 화해의 경구를 가슴에 품게 된다. 아, 얼마나 오묘한 순간인가! 내렸던 바지 지퍼를 다시 올리면서 이루어지는 인간 의식의 정화(淨化)! 한국의 공중화장실이야말로 영혼의 세탁소라 할 만 하지 않은가.
낯선 작가, 익숙한 소설
얼마 전, 일본의 소설가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 <종말의 바보>를 읽었다.
나는 일본문학 전문가는 아니다. 그렇다고 문외한도 아니다. 좀 뻔뻔하게 표현하자면, 주변사람들에게 일본문학을 가지고 적당히 썰 풀어먹을 정도는 된다는 얘기다. 그런 나에게 ‘이사카 고타로’는 낯선 작가였다. 그의 소설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였고. 하지만 그의 소설 <종말의 바보>는 낯설지 않았다. 이 소설 속에 녹아있는 작가의 세계관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서 본 것들이지?’라는 의문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 때 떠오르던 것들!! 그것은 바로 공중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딱 내 눈높이에서 어른거리던 바로 그 ‘착한’ 문구들이었다. 갈등의 벽을 넘어 화해의 광장에서 서둘러 악수하라는 충고의 전언들 말이다.
진정한 화해는 뼈를 깎는 성찰을 동반한다
이미 말했다시피 이 소설은 화해를 주제로 삼고 있다(적어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렇게 읽었다). 지구의 종말을 3년 앞둔 시점, 일본의 센다이 힐즈 타운이라는 곳에서 여덟 개의 갈등 상황이 등장하고 그 각각의 불화들이 여덟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씩 갈등의 빗장을 푼다. 그 과정은 일사천리다. 각자의 상황은 다르지만 결과는 똑같다. 모든 것이 다 해피엔딩! 그런데 그 뒷맛이라는 게 영 개운치 않다. 세상은 이 소설의 결말처럼,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의 문구들처럼 그렇게 화해에 너그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언뜻 보면 세상은 무수한 화해의 퍼레이드로 장식되는 것 같다. 방금 전까지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술 몇 잔 마시고 난 후 호기롭게 화해한다. 지난 날 변혁운동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탄압했던 사람들과 웃으며 악수를 나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화해의 진풍경!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내 눈에는 그 풍경들의 대부분이 ‘헛것’으로만 보이니 말이다. 내가 염세적 성향이 강한 탓일까? 굳이 부정할 맘은 없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현실 속에서 드러난 역사도 결국은 화해의 허상을 많이 폭로해왔고, 또 폭로하고 있는 중이니까.
이 소설을 읽을 즈음 함께 읽었던 책이 바로 <신영복 함께 읽기>였다. 신영복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서 ‘양심수’로 청춘을 바친 한국현대사의 희생양. 그와 동시대에 철창신세를 졌던 많은 정치범들 중 대부분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신영복은 이 시대의 참스승으로 많은 이들에게서 추앙받고 있다. 같은 희생양이었지만 누구는 망각의 수렁에 빠지고 또 누구는 사표(師表)로 자리 잡는 또 하나의 ‘양극화’현상. 그 이유를 추적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이 두 갈래의 아득하기만 한 어긋남을 ‘화해의 방식’이라는 것에서 찾는다. 끊임없는 인정투쟁을 통해 획득한 화해의 제스처와, 20년 20일을 뼈를 깎는 성찰로 채운 이의 진정한 화해의 차이. 신영복이 어제 다르고 또 오늘 다른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도 쉽게 타협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은 순전히 그런 지독한 성찰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영혼의 세탁소에서
한국에서도 제법 팔린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라는 소설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이 작품도 일종의 화해의 문학이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종말의 바보>와 이란성쌍둥이라 할 수 있다. 갈등에서 화해로 이어지는 일사천리의 고속철도 (다만, <공중그네>에서 엽기 캐릭터인 이라부 박사가 화해의 메신저인 반면, <종말의 바보>는 지구의 종말이라는 훨씬 ‘쎈 놈’을 메신저로 내세웠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 두 책은 “화해하면 행복해진다”는 만고의 진리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건 분명 두 소설이 가진 미덕이다. 허나, 유통기한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비관적인 얘기지만, 매달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가 수십만 권씩 팔려 나간 지 꽤 오래되었어도 이 사회에는 여전히 좋은 생각보다는 나쁜 생각이 활개친다. 그러한 현실이 ‘좋은 생각’류의 화해 문학이 가진 한계를 반증한다.
앞에서 나는 한국의 공중화장실을 영혼의 세탁소라고 했다. 볼일을 보기 위해 내린 바지 지퍼가 다시 원상복귀하기 까지는 채 1분의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그 찰나와도 같은 순간에 벼락처럼 맞은 영혼의 정화.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영혼의 세탁소를 나선 지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속물의 허방에서 다시 허우적댄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종말의 바보>를 가슴 따뜻하게 읽고 나서도 뒤끝이 영 씁쓸했던 이유. 이제는 독자들도 이해하려나?
이휘현 | 전북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현재 KBS 전주방송총국에서 PD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