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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 |
전주천의 다리들
관리자(2006-10-14 10:23:24)
전주천 다리, 물산을 잇다 글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하천과 다리의 의미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수천 년 동안 전주를 싸고돌았던 전주천은 그 먼 옛날에 승암산을 시작으로 북으로 흘러내린 구릉의 서쪽을 끼고 돌았다고 하지만, 그 흔적을 찾기는 한 두어 장 깊은 땅 속에서나 가능하다. 사람들의 기억하는 전주의 하천은 전주천이 유일하고, 그중 가장 으뜸의 다리는 싸전다리일 것이다. 한때는 전주교라 불린 싸전다리가 전주사람들에 그렇게 크게 다가간 것은 남문밖 시장이라는 거대한(?) 물류의 중심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뒷켠에 전주부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풍남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싸전다리를 중심을 좌우에 펼쳐진 전주부성의 장날은 그야말로 온 갓 사람들이 모이는 대동의 공간이었다. 남문밖 시장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이 남문밖 시장으로 잘 못 알고 있는 흰옷을 입은 수많은 시장사람들이 모여 있는 반석리의 시장(<사진 1>)이 바로 싸전다리 양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늘 전주사람들에게 전주천 하면 싸전다리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주천에 싸전다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풍남문을 나서 남쪽으로 향할 때에 건너는 다리는 지금의 싸전다리가 아니라 안경다리, 무지개다리라 불렸던 남천교였다.(<사진 2>) 당시만 해도 싸전다리는 나무로 얽기 설기 엮어 만든 임시다리였다. 풍남문으로 곧 바로 연결되는 다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허용될 수 없는 도전적인 모습으로 도시방어수단이라는 본질적 목적에 의해 거부되었고, 미학적으로는 직선적이며 도전적이지 않은 은유적이며 여유로운 동선을 추구한 우리민족의 감성이 반영된 결과라 하기도 한다. 어쨌든 싸전다리가 남천교를 제치고 중심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남천교가 홍수로 사라져 버렸고, 일제가 1922년 콘크리트 다리를 현재의 싸전다리에 놓으면서부터 이다. (<사진 3>) 말하자면 싸전다리는 조선시대에서 일제로 전환되는 과정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전주의 중심다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리의 변화가 가져온 사례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조선시대의 지도를 보면 전주천에 놓여진 대표적인 다리로 남천교, 서천교, 완산교가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매곡교, 사마교(현 다가교 부근) 등은 돌만 놓여진 징검다리가 있거나 임시다리였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장터가 형성되었다. 전주천을 끼고 놓여진 다리는 사람들의 왕래를 쫓아 그리고 넓은 공터를 찾아 형성된 시장들이 이어졌다. 싸전다리(쌀 가게), 설대전다리(담배대 가게, 현 매곡교), 소금전다리(소금가게, 현 완산교)는 그중 대표적인 다리 밑 시장이었다. 싸전다리에서 소금전다리까지 이어지는 전주부성의 남쪽을 흐르는 구간(그래서 이 구간을 남천이라 부른다)은 서문과 남문의 사이로 경향각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물산을 잇는 물류기지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나무시장이나 소시장도 이 다리들 사이에 있었다. 1922년 일본은 싸전다리와 완산교를 콘크리트 다리로 가설하자 전주천을 건너는 사람들과 물산은 이들 다리에 집중되게 되었다. 남천교와 서천교가 홍수로 유실된 뒤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싸전다리와 남문밖시장, 완산교와 서문밖시장이 연결되면서 물산의 기능은 여전히 이어졌지만 그 핵심은 변화하였고, 이 다리를 중심으로 근대 교통망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구축되었다. 용머리고개의 파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현재 전주천에는 승암교로부터 한벽교를 지나 추천대교까지 14개 정도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싸전다리는 노인분들의 놀이터로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의 다리는 옛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1968년 전주천 고수부지에 있는 임시가옥들을 대대적으로 철거될 때까지 전주천과 다리, 다리밑, 다리와 다리를 잇는 공간의 기능은 세상에 뒤쳐진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근근히 기능하기도 하였다. 세상이 바뀌면서 다리와 다리를 싸고 있는 수많은 문화들이 사라져 버렸고, 죽었던 하천이 되 살아나면서 21세기 문화트랜드에 의해 하천은 그 기능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전주천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없어진 것이 1980년대였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 남 천 교(南川橋) : 현 전주교 상류 170미터 지점 강암서예관을 못미친 자리에 위치하였다. 원래 돌다리(石橋)였던 이 다리는 1753년 유실되었다가 정조대인 1790년 김응록, 박사덕 등이 복구사업을 시작 1만 4천냥의 돈을 모아 1791년 8월 공사를 시작해서 12월 완공하였다. 이때 다시 만든 다리 모양을 보고 안경다리(眼鏡橋), 오룡교(五龍橋)라고도 불렀다. 다섯 개의 창을 가진 무지개 모양의 다리였으며 각 창 머리에는 용머리를 새겨 놓았는데 승암산이 화기(火氣)을 머금은 형세여서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다시 무너 진 1901년 관찰사 조한국이 평교(平橋)로 개축하였으나 1907년 수해를 입어 부서지자 같은 해 백남선의 후원으로 재수축하였으나 3년후 홍수로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 서 천 교(西川橋) : 원래는 흙다리(土橋)였으나 순조대 관찰사 한용구, 조인영, 이규현 등의 노력과 성내 백성들의 성금을 모아 1833년 돌다리(石橋)를 놓았다. 탄탄하기란 마치 땅바닥을 딛는 것 같았으며 놓여진 돌들의 모습은 고기비늘처럼 눈부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는 그후 홍수로 붕괴되었으며 1845년에 전주부성 사람들을 동원 개축하였다. 1896년에는 승지 김창석이 사재를 털어 개축했으나 오래되지 않아 무너졌다. 그후 1931년 박기순이 서천교 다리돌을 옮겨 완산에 청학루(靑鶴樓, 옛 국악원)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대신 목교(木橋)를 현 서천교가 있던 자리에 놓았으나 1936년 대홍수 때에 유실되었다. ◎ 싸전다리(米廛橋) : 지금의 전주교 자리에 있던 다리로 나무다리(木橋)였다. 옛날에 이 다리목을 끼고 좌우에 싸전(쌀가게)들이 늘어져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사람들이 사탕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후 1922년 전주교가 건립되었는데 전북 최초의 콘크리트 시공이었다. 이 전주교는 1936년 대홍수 때에도 유실되지 않은 유일한 다리였다. ◎ 설대전다리(煙竹橋) : 현 남부시장에서 완산칠봉으로 들어가는 매곡교 자리이다. 옛날에 이 다리 아래 쪽 서천교 사이로 담뱃대(煙竹, 설대) 장사들이 좌전(坐廛)을 벌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 다리 밑은 우시장이 열려 쇠전강변이라고도 했다. ◎ 소금전다리(鹽廛橋) :  현 완산교에 놓였던 다리이다. 옛날 소금가게들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22년 전주교와 함께 콘크리트로 완산교가 놓여져 용머리고개를 넘어 정읍방면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6년 대홍수 때에 유실되었으나 그 이듬해 다시 완공하였다. ◎ 사 마 교(司馬橋) : 현 다가교 위쪽에 놓였던 다리. 옛날에는 이 다리를 건너 다가정, 사직단, 향교의 사마제 등이 있었으며 고개를 넘으면 화산서원(華山書院)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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