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
시각장애인과 저작권
관리자(2006-10-14 10:21:50)
필자가 존경하는 한 교수님이 있다. 그와 알게 된 지는 햇수로 벌써 25년이 되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고등학생이었고 필자는 대학생이었다. 국립서울맹학교 고등부 1학년 김영일 군.
소아 때 실명한 그는 일종의 직업훈련학교인 맹학교의 고등학교 과정에 있었는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과외공부가 필요하였다. 당시는 과외가 금지되던 시절이었으나, 금전적 대가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과외는 허용되었다. 필자는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교정을 떠나 청와대 옆 인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맹학교를 찾았고 그곳에서 김군을 만났던 것이다.
그곳은 늘 어두웠다. 앞을 못보는 학생들이 있는 곳이었기에 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수학의 함수와 그래프를 설명할 때, 그들의 손을 맞잡고 곡선을 그려가며 공부했다. 김영일 군은 남다른 노력 끝에 비장애우들과 같이 경쟁하여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였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경이로운 토플 점수를 얻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후 연락이 끊겼는데, 얼마 전 우연히 케이블 TV 방송의 대담프로그램에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연락하게 되었다. 김영일 군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후 조선대학교 특수교육학과 교수가 되어 있었다. 십여 년 만의 재회였고 그 역시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필자는 “영일아”, 김교수는 “형님” 하는 사이가 그새 회복되었다.
오감 중 하나인 시각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다. 신체 중 눈이 9할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김교수가 겪은 어려움을 필자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우연히 그로부터 들었던 몇몇 에피소드가 있을 뿐이다. 대학시절, 당시는 전동타자기가 막 나오던 시기였는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김교수는 수동타자기를 썼다고 한다. 학교숙제를 위해 밤새 타자기를 두들겨댔던 김교수는 다음 날 호기롭게 담당교수에게 페이퍼를 냈는데, 교수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았다. 알고보니 타자기의 토너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열심히 쳤던 모양이다.
맹학교에 봉사하러 다닐 때, 우리가 깨알같은 글씨로 한권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영어사전과 성경책이, 점자책으로 된 것은 책꽂이를 가득 채우는 분량인 것을 보고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우리 주변에 수없이 널려 있는 여러 가지 책들, 각종 활자매체에서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문 등은 세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우들은 이와 같은 문화혜택으로부터 소외되거나 접근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십 수 년 전만 해도 저들이 소설을 읽는 길은 두 가지였다. 점자도서관에서 점자로 되어 있는 책을 빌려 읽는 것인데, 한 권의 사전이 서가를 빼곡히 채울 정도의 분량이니, 점자로 된 소설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점자책이 따로 나오지 않으니 시각장애인들의 요청에 따라 봉사자들이 묵자로 된 책을 보면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점자책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이 보다 좀 나은 것이 구술 녹음된 테이프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어린이 동화구연처럼 녹음된 테이프를 재생시켜 소설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구술녹음을 해주는 봉사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제한된 책만이 녹취되어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우들은 그야말로 문화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다음 호에 계속).
(남형두, 연세대 법대 교수, hdn@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