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
솔찬히 아고똥허당게
관리자(2006-10-14 10:18:57)
‘징게 맹겡 외배미 뜰’의 너른 들녘을 가진 전라도 땅은 기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살기가 나은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먹을거리도 다양하고 풍족해서 먹는 문화가 발달되어 왔음은, 반찬이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는 타지 사람들에게 전라도 사람들이 반찬값은 내가 낼게 하는 식의 농담을 던지는 방식으로 예증된다. 생계를 위한 일차적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더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있게 마련이며 앞서 말한 바탕 위에서 고대소설과 판소리 등을 비롯한 문학과 예술이 이 땅 위에 풍요롭게 피어났던 것도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전라도는 흔히 맛과 멋의 고향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전라도는 개혁의 땅이기도 하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그 잔존 세력을 경계한 일과,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 역시 전주가 관향인 점과, 임진년 왜병들이 조선 팔도를 휘젓고 다닐 때도 전라도 의병들에게 곤욕을 치른 일과, 동서 당파 분쟁의 답답한 소용돌이 속에서 전라도를 반역향의 나락으로 내몬 정여립 역시 전주 사람이고, 구한말 주권 국가를 지향하며 사회 개혁을 꿈꾸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정읍 고부 사람이었던 점과, 이념 대립으로 갈기갈기 찢긴 국토에 빨치산이 대거 몰려 있던 곳도 역시 지리산, 회문산 등의 전라도 땅이었던 것을 보면, 하여튼 전라도는 ‘솔찬히 아고똥헌’ 동네임에 틀림없다.
이 두 가지 사실, 맛과 멋을 즐기며 살아가면서도 개혁을 꿈꾸었던 전라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한 표현은 아마도 ‘솔찬히 아고똥허당게’가 제 격인 것 같다. 평소에는 순박하기만 한 것 같은데 일단 어떤 문제가 생기고 나면 ‘짯짯이’ 따져서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솔찬히 아고똥헌’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이다.
‘솔찬히’라는 부사는 ‘수월찮-+-이’에서 비롯된 말이다. ‘수월찮다’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까다롭거나 힘들어서 하기가 쉽지 아니하다’와 ‘꽤 많다’로 풀이되어 있어서 형용사 ‘수월찮-’에 부사파생접미사 ‘-이’가 결합한 ‘수월찮이’의 뜻은 ‘무엇인가를 하기가 쉽지 않게, 꽤 많게’ 등의 기본 의미를 가진다. 그 ‘수월찮이’가 전라도식으로는 ‘솔찬히’이다.
그러나 전라도식 표현 ‘솔찬히’는 표준어 ‘수월찮이’가 가진 문자 그대로의 의미 ‘수월하지 않게’로 사용되기보다 ‘상당히 많게’의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며,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이미 ‘솔찬허다’로 재구조화된 단어가 있을 정도에 이른다.
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수월찮은(*솔찬헌) 일이다.
② 계단이 높아서 오르내리는 것이 수월찮다(*솔찬허다).
예문 ①과 ②에서 표준어 ‘수월찮다’를 ‘솔찬허다’로 바꾸는 것은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어색한 일이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솔찬허다’가 ‘꽤 많다’로 굳어져버렸기 때문에 ‘쉴지 않다’의 문맥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③ 덕유산에서 함양까진 수월찮은(*솔찬헌) 거리다.
예문 ③에서 ‘수월찮은’의 의미는 전라도 사람들에게 ‘상당히 먼’의 의미로 이해된다. 다음 예문들에서는 그러한 차이가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④ 친척 어른들께 두루 세배를 하니 세뱃돈이 {수월찮았다, 솔찬혔다}.
⑤ 대감은 이제 식구가 불어나 씀씀이가 {수월찮을, 솔찬헐} 테니 내 한 입이라도 덜어 드려야 도리일 듯싶었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⑥ 그의 몫이자 집안의 경제를 지탱해 주고 있는 유일한 끈은 그런대로 {수월찮이, 솔찬히} 남아 있는 전답이었다.≪최일남, 거룩한 응달≫
⑦ 뻔질나게 국경을 넘나들려면 노자도 {수월찮이, 솔찬히} 들 테니 보태 쓰게.≪박완서, 미망≫
사실상 ‘솔찬히’보다 ‘아고똥허다’의 의미나 이 단어의 생성 경위가 더 지난하다. ‘아고똥허다’는 말은 일단 힘의 우열 관계에서 열세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우위를 차지한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표현하며 굽히지 않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누군가가 ‘아고똥’하려면 적어도 자신의 논리와 정당성이 확보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한 태도를 드러내는 데는 반항심이 동반되는 게 보통이다. 그러저러한 맥락을 감안하여 보면 이러한 의미와 가장 근접한 표준어는 아마도 ‘아귀’와 ‘뚱하다’라는 단어의 조합일 듯싶다.
‘아귀’는 손이나 입의 ‘갈라져 있는 부분’을 의미하며 통상 ‘손아귀’ 혹은 ‘입’을 비하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전라도에서 ‘아굿심이 세다’는 말은 ‘손아귀의 쥐는 힘이 센 것’도 의미하지만 ‘말발이 센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귀’와 함께 쓰여서 사람의 성정을 나타내는 말들로는 다음의 예들이 있다.
⑧ 아귀(가) 무르다 : 남에게 순순히 잘 굽혀드는 성질이 있다.
⑨ 아귀(가) 세다 : 남을 휘어잡는 힘이나 수완이 있다.
남에게 순순히 굽혀들지 않는 성질이 있다.
⑩ 아귀(가) 차다 : 휘여 잡기 어려울 만큼 벅차다.
예문⑨의 ‘아귀세다’는 전라도 식으로는 ‘아굿심시다(아귀 힘 세다)’에 대응하며 이런 방식으로 ‘아귀 뚱하다’라는 단어가 형성될 개연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뚱하다’의 의미, ‘말수가 적고 묵직하며 붙임성이 없다’와 ‘못마땅하여 시무룩하다’의 의미 가운데 ‘못마땅하여’와 ‘아고똥허다’의 의미 사이의 상관성을 감안한다면 ‘아고똥허다’는 ‘아귀 뚱하다’에서 출발하여 ‘아구뚱허다>아고똥허다’의 음운 변화를 거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전라도 땅이 어쩌다 ‘솔찬히 아고똥헌’ 동네가 되었는지는 역사가 풀어내야 할 몫이지만 그 ‘아고똥헌’ 자세는 되레 이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칫 조화롭지 못한 사람들로 낙인찍히거나 균형을 잃은 억지 부리기 식의 ‘아고똥함’으로 오인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태도가, 우리 아이들이 살아야 할 미래의 삶을 더 성숙하고 진실하게 만들어가는 동력으로 작용될 수 있도록 균형 잡힌 태도를 견지해야 마땅하며 그렇게 할 때야만 비로소 ‘솔찬히 아고똥헌’ 것의 가치가 제 빛을 띨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