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 | [시사의 창]
[전북의 땅과 문화, 사람들 - 정읍]
으뜸이었던 옛 명성을 뒤살린다
정읍농악보존회
장세길 문화저널 기자(2003-04-08 10:11:59)
공무원, 교사 그리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 등 정읍농악보존회를 꾸려가는 이들은 다양하다. 20대에서 60대까지 나이차도 크지만 쇠채나 장구채를 잡아본 이력도 2년에서 10여년이 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정읍농악이 울리는 곳에선 나이차도 경력차도 직업도 느낄 수 없다. 한때 우도농악을 대표했던 정읍농악의 가락앞에서 그들은 그저 '신명'을 느끼는 장구잡이요, 쇠잡이인 것이다.
1994년 꾸려진 정읍농악보존회는 광복 직후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연거푸 2회 수상한 명성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는 단체다. 그때 대통령상을 수상한 정읍농악의 중시조격인 이봉문 선생과 그의 가락을 이어받은 유남영 선생의 풍물을 고스란히 이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읍농악이 이렇게 한때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입암면 대흥리에 본부가 있었던 6백만 신도의 보천교에서 풍물을 수용, 적극 권장했기 때문"이라고 향토사학자 김재영씨는 설명한다. 정읍풍물굿은 바로 이때에 체제가 갖추어졌다고 할만큼 전성기를 이룬 것이다. 한때 흩어졌던 우도굿의 명인들이 정부수립 직후 전국농악대회를 위해 당시 거점지역이던 정읍에 모인 것도 정읍농악이 명성을 날린 이유중의 하나다.
보존회의 보존회 단장은 유지화 선생. 도 무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돼 있다. 열다섯살부터 풍물을 시작한 그는 40여년동안 동악농악단원 생활을 하면서 전북여성농악단, 호남여성농악단, 전주아리랑농악단, 유지화농악단, 충효국악예술단 등을 운영한 말 그대로 농악과 평생을 살아온 명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