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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 |
해변의 여인
관리자(2006-10-14 10:14:36)
홍상수의 인간 극장, '키치 三人行'///三人行, 개 한 마리 홍상수의 인간극장 재료는 역시 삼각관계와 스캔들. 볼펜으로 꼭지점을 찍어 말하던 중래(김승우)식 개똥철학으로 이야기 하자. 이 해변의 피크닉에는 두개의 삼각관계가 걸쳐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또는 여자 둘 남자 하나가 만드는 삼각형의 꼭지점이 서로 교차되는 부분, 그 빈 공간 안에 신빙성 없는 화자들이 뱉어내는 어양스런 언어가 나부끼고 객관적 상관물로서 하얀 개 똘이가 뛰어 다닌다. 이 삼각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있어 인물의 입체감을 더해준다. 선현 가라사대, 三人行이면 必有 階級이라. 그 순서는 나이 실력 마인드 화폐(유산)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여성동무들은 능력치나 학벌이 고만고만하다면 역시 미모가 계급을 만들 터. 그러나 이 카스트 제도에는 자율성이 있어 투쟁보다는 협력과 경쟁의 관계를 통해 서로를 수용한다, 마치 고스톱처럼. 패를 돌리는 자 영화감독. 이 예술가들은 감독이자 선배라는 상위 계급과 미술감독이자 후배라는 위계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평화롭게 서해안으로 향한다. 이 삼인조는 특별히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드러내지 않고 서로를 균점하지만 파도도 없는 해변에 이르자 바람과 횟집의 소주는 이들에게 독점의 대립항을 선물한다. 너구리 김승우, 착한 남자 김태우 모티브는 글쓰기. 그러나 글만 쓰면 뭔 재미? 여자가 있어야지. 마감이 임박한 시나리오를 쓰고자 해변을 찾는 중래의 사회적 가면은 감독, ‘나도 써야 돼, 나 힘들어서 그래. 집중 좀 할려구.’(허 참, 누구 닮았다.) 겨우 제목만 정한 너구리를 모시는 미술감독 창욱(김태우)과 그의 아직 '자지 않은 애인' 문숙(고현정)이 서해안 바닷가에 서 있다. 중래는 김훈의 소설「뼈」에 등장하는 대학건달 오문수를 빼닮았다. 학문하는 변두리 지식 잡상인들의 특기는 공부보다는 연애질. 그가 만나는 여자들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도 대학근처에 서식하는 종자들. ‘시간이 역사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밝히’고 싶다는, 오문수 비슷한 개소리를 중래가 늘어놓는다. '이건 단순한 이미지 같지만(끊임없이 조건절을 붙인다), 나는 이미지와 싸우고 있는 중이야. 이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앓는 소리로 페인팅을 보이면 앙큼한 고양이 문숙은 게으르게 슬로우 비디오처럼 넘어가 준다. 이발소 대신 횟집에서 벌어지는 키치다. 어진 사람 김태우. 지나치게 사회화된 인간형. 교양인이란 남을 무시하지 않고 고통을 주지 않는 존재라는 신념이 확실한 남자. 예쁘기만 하면 멍한 여자를 착하고 선량하게 인식하는 것이 오래된 남자들의 습성인 바, 그 대표적 인물. 유부남 주제에 애인을 데려온 김태우는 종업원을 욕한 김승우에게 사과하라며 같잖은 양심으로 선배를 볶아댄다. ‘결국은 이렇게 하셔도 저 감독님 존경하거든요.’ 이렇게 꼬박꼬박 땡큐를 연발하며 작은 일에 집착하는 남자를 여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만 모른다. 준비된 여선수 고현정, 넘버투 송선미 감독은 서해안 포구에 이르러 바닷가는 보여주지 않고 세 사람에만 초점을 맞춘다. 해질녘 사양의 나쁜 광선에서 머리카락을 붙잡는 해변의 여인 고현정 예쁘다. 계층을 나타내는 여러 지표들 중에 유학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예술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문화적으로 브라만에 속하는 계급. 독일남자 몇을 상대했지만 그녀는 유학파 싱어송 라이터. 감독님 팬이라며 데모테잎을 들려주면서 자신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이건 좀 대중적인 것인데요, 사실 좀 더 괴상한 것이 있어요.’, 예쁜 데다 문화소양도 제법 갖춘 이 물건은 햇볕아래서나 바람아래서도 눈부시다. 아무에게나 주지 않지만 줄만한 놈에게는 언제든지 한 자리 할 준비가 된 이 여류 예술가는 내 눈물 깨끗하다면서 술 마시고 주정하는데, 인물 내부의 양가감정을 잘 잡아내는 홍상수, 캐릭터 잘 골랐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 빛에 물 들은 여어이인의 누운동자' 나훈아의 노랫말. ‘얼굴이 좋은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사실, 얼굴이 너무 커요.’ ‘영화에서 느낀 것과 많이 다르시네요.’, 홍상수가 고현정을 통해 던지는 그 뻔한 대사들은 노랫말과 박빙의 수준차를 드러낸다. 홍상수가 따온 영화제목 자체가 예술가님들의 뻘짓이 마치 예술적 감수성이라고 떠드는 것에 대한 키치적 놀림으로 제목을 정한 것은 아닐까(황지우의 '산유화'라는 시를 검색해 보시라). 허허. 그래도 쓸 만한 대사도 가끔은 있다. ‘나이 드니 서해안이 좋아요, 해가 지고, 별이 밤에 뜨는 곳’ 서로들 제법 이런 운치 있는 대사를 나누다 이들은 도둑처럼 모텔에 든다. 그러나 며칠을 못가는 중래와 문숙의 사랑은 남자로 좋아한 것은 접고 감독으로서 많이 좋아한 걸로 쉽게 끝을 내는데, 이 여자분에게는 남자 사이에 빠진 것보다 차가 모래에 빠진 것이 훨씬 실존적 문제다. 선희(송선미), 이 여자 역시 감독이라면 꺼뻑 죽는 체질. 고현정의 부드러운 치맛자락에 비해 바지를 입은 송선미는 능청스럽게 여인2를 연기한다. 여인1을 위해 여인2를 죽일 줄 아는 좋은 연기. 남편의 바람기에 괴로워하는 커피점 부점장 송선미 보다는 독일유학파가 어딜 보아도 능력치나 가격대비 성능이 훨 낫다. 거참, 머리끄댕이 잡지 않고 교양있게 탐색하는 여인들의 모습도 키치 아닌가. 혹시 이 선희 캐릭터는 떡볶이나 해장국 잘 한다고 홍상수 자신에게 들러붙던 여자는 아니었을까. 상수씨, 이제 키치 고만하자. 뻔뻔한 상수씨의 이번 영화에는 그래도 친절의 당의정이 조금 더 입혀졌다. 모호한 말들을 흘려보내는 사원으로서의 역할에 익숙하던 그가 이제 해변으로 내려와 들려주는 통속적인 연애담에는 카메라가 줌인 줌 아웃으로 움직여 제법 편한 화면을 만든다(<극장전>에서는 PAN을 사용하더니).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던 그도 이제 전주(錢主)를 생각하는 것일까.   홍상수, 대중을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 사람. 당연히 그는 대중이 자신의 영화에 기대지 않는 것에 누구처럼 징징대지 않는다. 그의 영화를 찾는 마니아 관객 역시 그의 영화에서 기대거나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 관객들은 관찰자이며 구질구질한 일상을 관찰당하는 쾌감이 있어 영화를 찾는 것일 뿐. 그가 창출한 인물들의 기억과 몽상과 환각을 좇다 보면 내가 바로 그놈이었다거나 나를 둘러싼 지식인들의 이야기였다는 마조히즘적인 쾌감도 없지 않았을 것. 형태를 난해하게 늘어놓은 퍼즐의 지각과정을 쫓아가면서 감독의 작전뻑을 찾는 것, 그러나 이젠 좀 질린다. 감독이란 자가 겨우 이미지와 싸우고 싱어송 라이터는 새로운 것 보다는 너무 앞서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미술감독은 진짜 분노할 것은 내버려 둔 채 중래의 말꼬리에 분노한다. 요것들, 모두 이발소 그림들이다. 일상에 숨어있는 삶을 연구 복원하고 해석하는 고고학자의 자세, 이것도 오래하면 키치다. 됐다. 이제 좀 진지해지라. 상수씨, 사람 속 긁어대는 비루한 연애 이야기 접을 때 되지 않았나. ‘고만 하자.’ ‘전 반복 같은 건 안 해요, 지옥이 그래서 지루한 거야.’ 영화에 있던 말이다.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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