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
가인 박동화
관리자(2006-10-14 10:11:02)
사라짐의 비유, 되살림의 연극성-연극 <가인 박동화>를 중심으로
글 | 김길수 연극평론가, 국립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전북연극인들 대다수의 뜻과 헌신적 참여로 무대화된 연극 <가인 박동화>(최기우 작, 류경호 연출,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연지홀, 2006년 9월2일-3일) 공연은 사라짐의 여운과 환타지, 이를 향한 순환극 구성을 유장하게 펼쳐 놓음으로써 이중의 비유 체험과 성찰 쾌감을 선사한다.
박동화의 파란만장한 연극적 족적과 예술 세계가 무대화됨은 한국연극사 및 전북연극 운동사에 지대한 의미와 가치로 기록될 것이다.
공연은 장례 풍경으로 시작된다. 무대를 가득 메우는 만장 깃발, 사라져 가는 자, 애도해하는 자, 장엄함은 숙연함으로 이어진다. 모두가 망자의 삶을 기리고 애도하는 분위기다. 어허… 어허 노오… 어 영차 어허노.
무대 위에 갑자기 늙고 남루한 복색의 노인(류영규 분)이 뛰어 오른다. “아---! 아니야.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이미 쇠잔한 육신, 노구를 이끌고 장례 풍경그림이 마땅치 않다고 공연 연습을 중단시키는 자, 과연 저 노인은 누굴까. 무언가 심취된 그러나 고뇌하는 얼굴 표정이다. 젊은 조연출이 그를 만류한다. 비틀거리는 노인,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노인, 박동화는 자신의 마지막 공연 작품인 <등잔불> 연습 과정에 막판 연극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연극 <등잔불> 공연 무대를 끝으로 그는 세상을 뜨고 만다. 프롤로그 공연 연습 그림은 에필로그에서 반복, 변조된다. 무대 전면에 등장한 박동화, 무대 후면 샤막 뒤로 실루엣으로 나타나다가 서서히 희미하게 사라진다. 관객은 마치 박동화의 장례식 순간을 접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지막 예술작업, 마지막 삶의 모습, 연극 체험은 비유 의미와 합쳐진다. 절묘한 이 이중 체험은 떨림과 뭉클함, 그리고 되살림의 묘미로 다가온다.
연극 공연은 주인공의 어두웠던 예술창작 환경으로서 무거움과 황량함이 주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적절한 희극적 릴리프 처방이 선보이면서 관객은 대중적 놀이 쾌감을 유감없이 경험한다.
무대 좌측 후면에 젊은 박동화(조민철 분)의 희곡 집필 과정이 클로즈업된다. 동시에 그의 작품 연극 연습 과정이 무대 중앙에서 펼쳐진다. 인물 호칭 언어, 대사 수정 작업, 이를 위해 작가는 피 말리는 글 작업에 몰두한다. 원고지 수정, 파지 내는 그림이 연출된다. 인물 명이 바뀔 때마다 배우들의 호흡은 바빠진다. 호칭이 바꿔질 때마다 동작선이 바뀐다.
“어, 이상하네… 호칭을 삼촌으로 바꾸어야겠다. 아니, 생각해 보니, 장인이란 호칭이 더 나아!”
이런 착상 변환 과정, 무대 중앙에 꼭두놀이를 방불케 하는 연습 그림이 펼쳐진다. 작가의 펜대 움직임에 따라 배우는 일 순간 마리오넷으로 변용 된다. 이런 패러디 놀이를 접하면서 관객은 순간적이나마 우월적 쾌감을 주체 못한다.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가 밝은 여건으로 전환된다. 일순간 해방감이 무대를 가득 메운다.
예술가로서의 순수성, 이를 지키기 위한 파란만장한 일대기, 딸의 너레티브로 시작된 공연무대는 인생의 숨어있는 비밀, 그 발견과 깨닫기 묘미를 향해 서사화 된다.
시 창작 열정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걸출한 작품으로 문단을 풍미한 후배들, 고뇌와 좌절감을 삭이며 떠난 일본 유학, 해법 찾지 못한 채 귀국했다가 연극 출연, 대다수 친일 어용 예술인들과의 갈등, 선술집 등에서 이웃 문인들과의 울분 토로, 무대는 보고 언어와 반응 정서 기호가 자연스레 교차한다. 이는 개인의 정서 표출 그림으로 경우에 따라 삼삼오오 그룹의 질펀한 풍자 놀이와 너스레 반응 언어로 확산된다. 일경 감시자, 그의 기웃거림 그림이 펼쳐질 때 드러내기 정서와 감추기 정서가 길항 작용을 펼친다. 긴장 속에서도 익살과 희화 매체가 빛을 발하면서 폭소와 쓴웃음이 교차한다.
신문사 컬럼 투고, 일경의 탄압, 고문, 고초 당하는 상황, 가학과 충격이 잔혹극 처방으로 펼쳐진다. 열여섯 연하 여인 김수산과의 사랑 그림, 이는 복고풍의 서정 색조와 낭만 색조로 펼쳐져 장년 관객은 향수와 회상의 아름다움에 젖어본다. 해방과 혼란, 육이오, 사랑하는 형제 및 가족을 잃어야 하는 상황, 인민군 치하의 고초와 투옥, 이를 위해 에피소드 형식, 금속파편 그림이 펼쳐진다. 울부짖는 정감의 반응 언어에도 불구하고 연민 유발보다는 헝클어진 당대 사회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 앞서 이루어진다.
숨어있는 예술가의 족적과 비화를 발굴하여 무대화한 다큐극 색조, 예술성과 시민성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펼쳐가려는 정통 리얼리즘 극 색조가 산발적이나마 빛을 발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어떤 예술 철학으로 극 창조에 매진해야 할 것인가’, 공연장을 문을 열고 나오면서 관객의 깨닫기 작업은 시작된다.
다양한 시공 변화를 위해 상징 무대가 펼쳐진다. 카페나 선술집 공간이 간단한 양식 무대로 대체된다. 내공 깊은 선배 배우 분들의 순간 상황 대처 능력, 정밀한 반응 기호 설계 능력은 이 공연의 깊이와 품격을 제고시켜 준다.
투옥, 고문, 구타 상황, 마음 속 인물과의 만남, 이를 위해 표현주의 연출 작법이 선을 보인다. 가상의 외부 환경 구조물은 소리와 빛으로 처리된다. 배우는 내면속에서 들리는 인물에 대해 반응한다.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의 만남과 부딪침이 멋진 연극성을 빚어낸다. 적절한 공간 에어리어 설정, 정밀 각도의 조명 설계, 탄력적인 반응 기호 설계, 집단 코러스 활용, 이들이 상호 앙상블을 이룸은 이 작품의 최대 매력이자 미덕이다.
당대 문화 상황, 사회 상황을 일깨우기 위한 창의적인 코러스 활용, 당시 분위기 및 향수에 젖게 만드는 춤, 음악 그리고 복색, 이들 간의 유기적인 조화 과정은 볼거리와 들을거리의 효능, 상징과 생략의 묘미, 빈 공간의 아름다움을 일정량 창출시키는데 기여한다.
무거움과 해방감의 절묘한 교차 작업에도 불구하고 극 구성력과 인물 설계 측면에서 아쉬움이 뒤따른다. 주인공과 문제 인물(상황)과의 부조화 관계, 이를 중심으로 펼쳐진 문제제기가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켰는가, 탄탄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는가, 이는 긴장감 창출, 갈등 확장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에 중요하게 탐색해야 할 숙제다. 적절한 픽션 구성작업, 다큐극 색조와의 적절한 배분 작업도 전체적인 극예술 완성도를 향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사라짐의 비유, 되살림의 연극성, 이를 향해 김기홍, 배수연, 류영규 등 걸출한 전북연극의 무대 거장들의 합력 작업이 빛을 발한다. 공연의 미시적인 각 그림을 안정감 넘치게 빚어가고자 했던 이 분들의 창작 열정은 후학 연극인들에게 대단한 도전이자 감동으로 다가오며 이는 전북연극운동사의 커다란 족적이자 새 지평 열기의 토대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