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
문화예술의 지방화가 살길이다
관리자(2006-10-14 10:02:27)
글|이규석 예술경영지원센터 센터장
1947년, 당시 프랑스의 유명 연극배우이자 연출자인 장 빌라 (Jean Vilard)는 파리를 떠나 지방 도시인 아비뇽 (Avignon)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축제중 하나로 손꼽히는 아비뇽 페스티벌을 창설한다.
장 빌라의 아비뇽 페스티벌 창설 취지는 “지방의 국민에게도 공연예술을 관람할 권리를 되돌려주고, 연극을 수도나 가스, 전기처럼 저렴한 값에 모든 국민에게 보급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읽은 한 논문에서는 세계의 주요 대도시들의 경우 전국 대비 인구 집중도 보다 문화예술 활동의 집중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경제의 중앙 집중도보다 문화예술의 중앙 집중도가 높다는 것이다.
뉴욕과 동경과 같은 대도시를 예로 들면, 인구 집중도는 전국 대비 15% 내외인데 비해 문화예술 활동의 집중도는 40% 내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서울의 인구 집중도는 전국 대비 25% 내외이지만, 문화예술 활동의 집중도는 80%에 육박하고 있다. 이쯤되면 문화예술의 중앙 집중이라기보다 문화예술의 중앙 독점이라고 할만하다.
우리나라 문화예술 활동의 중앙 집중 아니 중앙 독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화예술 하드웨어의 지방 분산과 소프트웨어의 중앙 집중”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예술 관련 기반시설은 전국 단위로 꾸준히 증설되어 왔지만, 문화예술 인적자원, 소프트웨어, 인프라 등은 여전히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문화예술 지방화는 기실 “문화예술 시설의 지방화”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정책적으로도 “찾아가는 문화활동”과 같은 미봉책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문화예술 격차를 해소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방의 문화시설과 국민들은 중앙의 문화예술 활동이 찾아오기를 고대하는 수동적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역으로 중앙은 지방의 문화예술 활동이 찾아올 기회를 좀체 마련해주지도 않는 것 같다.
우리 문화예술계는 여전히 많은 정책적 과제와 현안들을 안고 있지만, 향후 문화예술 정책의 핵심적 화두는 “문화예술의 지방화”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문화예술의 지방화”는 문화예술 인적자원, 소프트웨어, 인프라 등의 지방 분산과 균형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지방의 우수한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육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문화예술 활동을 지방으로 분산, 이주,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수단 등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중앙에 밀집되어 있는 문화예술 단체들이 지역 단위의 문화기반 시설들과의 연계를 통해 지역으로 분산, 정착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유도가 필요하다. 두 번째, 지역을 기반으로 독창적인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조직화시킬 수 있는 문화기획·예술경영 전문인력 양성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세 번째,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을 진작시킬 수 있는 지원기관, 지원수단 등의 인프라가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무엇보다 중앙에 밀집되어 있는 우수한 문화예술 단체들의 지역 분산 및 정착에 대한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지역의 무수한 문화예술 기반시설들이 수동적인 ‘유통공간’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지역 문화예술의 ‘창조공간’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파트너쉽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예술 단체 상주제도”와 같은 정책수단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로또 복권기금이 대량 투입되고 있는 찾아가는 문화활동류의 지원방식을 적극적으로 개선하여, 중앙의 우수한 문화예술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지방의 문화기반시설들과 창조적 파트너쉽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중앙에 밀집되어 있는 문화예술 분야의 우수한 인적자원과 프로그램을 지역으로 분산,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대안은 설득력 있는 정책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중앙의 우수한 문화예술 단체가 자발적으로 지역으로 이주, 정착할 수 있는 별도의 지원수단을 확보해주는 것은 중앙정부의 몫이다. 반면 이주, 정착한 문화예술 단체의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지속성을 지원해주는 것은 지방정부의 역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성적으로 소프트웨어와 프로그램 빈곤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지역 문화기반시설에 창조적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한편,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양질의 문화향수 기회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켜주기 위한 방편으로서 “문화예술 단체 상주제도”의 도입과 로또복권기금의 지원방안 등을 적극적으로 강구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적극적인 시도가 “문화예술 지방화”의 화두를 긴 호흡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의미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기를 기대해본다.
오늘날 아비뇽 페스티벌의 세계적 명성은 장 빌라의 귀향 이후 60여년의 역사가 누적된 결과라는 사실을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규석 |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집행위원장과 광주비엔날레 축제행사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현재는 재단법인 예술경영지원센터 센터장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소위원회 위원, 과천한마당축제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