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
신발 한 짝을 간청하는 노래
관리자(2006-10-14 09:54:33)
문학대에 올랐습니다. 문학대가 이미 헐리고 없으니 문학대가 있던 언덕에 올랐다고 말해야 바른 말입니다. 주변이 온통 공사판이라 오며가며 보았던 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무턱대고 문학대를 바라보며 올라가니 임시도로가 나오고 문화재발굴현장 입간판이 화살표를 턱짓하며 서 있었습니다. 자동차 바퀴들이 비탈면에 만든 새 길도 곧 사라질 운명이라 무섭게 단순한 직선으로 휘었습니다.
고려 공민왕 시절 마전부락 앞 삼천 냇가에 집을 짓고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다는 황강 이문정이 처음 문학대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후 임진왜란을 당하여 소실되고 집터만 남아있던 것을 순조 24년, 서기 1824년에 이르러 중건하였고, 1977년에 다시 마루 가운데 온돌방이 놓인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학대에 문학대는 없고 흐린 구월 오후의 햇살 속에 무덤만 텅 빈 내부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습니다. 지표면 가까이 기와 조각들이 자가웃 쌓인 아래 바로 무덤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다듬지 않은 돌이지만 반듯한 쪽을 골라 무덤의 벽을 만들었습니다. 돌을 쌓아 만든 방 아래 곱게 한 켜 깔린 자갈이 죽은 자에게 바친 마지막 경배의 정성을 보여줄 뿐, 안에 놓여 있던 관도 주검도 허공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무덤의 주인은 남쪽으로 난 문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가볍게 하늘로 날아갔습니다. 주변에 크고 작은 무덤들이 즐비합니다. 지면에 포장을 치고 덮은 것들도 무덤인 모양입니다. 문학대에 와서 흐르는 세월을 보잤더니, 허물어진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물거립니다.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굉장합니다. 서부신시가지가 들어서면 마전뜰은 아파트 단지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도청과 경찰청 사이를 달려온 큰 길이 언덕 아래에서 어서 비키라고 눈을 부라리고 있습니다. 벌써 이전 복원하기로 결정이 나서 머지않아 문학대 언덕도 저 무덤떼의 주인들처럼 허공중에 떠올라 산화한 이름이 될 것입니다.
그릇이 놓여 있었던 자리에 흙이 밀려난 자국이 둥그렇게 찍혀 있습니다. 지하에 머물렀던 시간의 기록인 셈입니다. 쓰던 그릇인지 껴묻자고 만든 그릇인지 모르지만, 그릇은 박물관의 전시실에서라도 다시 사람의 손길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릇의 주인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릇의 주둥이에서 무덤에 들어간 사람 뿐 아니라 무덤의 돌을 날랐던 사람들, 그릇을 만든 사람들, 저 마을에서 태어나 모악산에서 흘러내린 삼천의 물로 마전의 뜰에 농사를 짓고 살다가 무덤도 없이 떠나간 이들의 생로병사가 이야기처럼 흘러나올지도 모릅니다. 아마 무덤 위에 정자를 지었던 분들의 이야기도 덤으로 붙어 다닐 것입니다. 황방산 산줄기의 곡선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고인돌이 놓이던 시절부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끊이지 않은 도시가 여기 있다는 증거로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교환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를 설득하고 싶으면 문학대는 금동관 하나라도, 아니 신발 한 짝이라도 토해내야 합니다. 그래야 지나가는 주목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쓸쓸한 풍요와 불행한 안락함인데 더 말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득과 함께 불만도 높아가고 서로 바라보는 눈초리에 날이 서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간절히 빌었습니다. 천지신명에 일월성신과 누대조상님, 제발 부탁에 신발 한 짝만 던져 주소서. 순금 아니라 금칠이라도 족하옵니다. 돌이나 쇠는 약효미달로 쓸모없으니, 이 점 반드시 참조하소서. 앙청.
| 정철성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