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9 |
'판소리의 세계화, 꿈이 아니다.
관리자(2006-09-11 14:36:30)
글 | 곽병창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미소라(Mitsora)- 헝가리 집시음악의 후예이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그러나 젊은 여가수. 자그마한 체구에 깡마른 얼굴 그러나 타는 듯 형형한 눈빛으로 보는 이들을 알 수 없는 낯선 시간 속으로 이끌어간다. 고작 세 명의 연주자와 그녀 자신이 직접 맡아 들려주는 보컬- 극상청으로 시종하며 비슷한 주제선율을 반복하는 낯선 노래들로 공연을 채운다. 마치 알 수 없는 시공으로 사라져버린 선조들,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현란한 손놀림의 타악 연주자 하나, 현악기와 관악기 여러 가지를 죽 늘어놓고 자유자재로 이들을 넘나들며 연주하는 중년의 연주자가 또 하나, 여기에 노트북으로 전자음을 만들어내는 힙합풍 헤어스타일의 총각 하나- 달랑 네 명의 연주자가 무대를 채워간다. 배경 스크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름다운 문양과 애니메이션은 그 다채롭고 발랄한 색감과 풍성한 무늬들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나중에 물으니 자기네 종족의 민화에서 따 온 것인데, 이를 바탕으로 해서 그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완성시켰다는 젊은 처녀가 대답해 준다. 낯설지만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 리듬, 그 집요한 반복 앞에 멍하니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머리칼을 누군가가 당겨 올리는 듯한 느낌의 섬뜩한 무표정의 얼굴에서 터져 나오는 짙은 슬픔의 목소리 그러나 결코 애처롭지 않은, 哀而不悲의 질긴 생명력을 읽는다.
투마니 디아베츠(Toumani Diabetes)- ‘Cora King’이라 불리는 콩고 출신의 연주자 겸 밴드 리더. 앉아서 ‘코라’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밴드를 이끌어간다. '코라'는 하프 또는 류트 계열의 소리를 낸다. 우리 25현 가야금과 비슷한 소리를 내지만 그보다 크기는 작고 줄은 더 많다. 조그맣고 둥근 항아리 모양의 몸체 주변으로 여러 개의 줄이 묶여 있는데 이를 퉁겨서 소리를 내는 전형적인 발현(發絃)악기이다. 신비스럽고 오묘한 선율이 끝없이 이어지는 연주에 낮고 그늘진 남성 보컬과 가늘고 힘찬 여성 보컬을 곁들여 노래한다. 여기에 크고 작은 대나무를 이용한 실로폰, 높낮이가 확연한 전통 북 등이 곁들여진다. 전자악기는 사용하지 않으며 비교적 느리고 서정적인 선율에 맞춰 여성 보컬이 춤을 춘다. 식민지 또는 핍박과 가난의 기억, 내전에 찌든 험한 일상의 그림자 따위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인간이 만든 악기로 저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가 싶은 경이로움만 남는다. 이미 스스로의 연주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져 있지만 청중들과 흔쾌히 그리고 완벽하게 교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오래 된 축제의 광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왕기석, 당대 최고의 연기력과 현장 적응력을 자랑하는 소리꾼이 한국인은 그만 두고 동양인 얼굴도 구경하기 힘든 낯선 축제에서 심청가 눈 뜨는 대목을 들려준다. 짧게 곁들인 해설을 통해 심청가의 스토리와 눈 뜨는 대목의 의미, 판소리를 맛있게 즐기는 몇 가지 방법을 일러 준 뒤이긴 했지만 관중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이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추임새는 내리쬐는 뙤약볕을 무색하게 했다. 심봉사가 임금 앞에서 ‘죄 많은 아비를 죽여 달라’며 눈물을 뚝뚝뚝 흘리는 대목에 이르자 그 통한의 눈물 떨어지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따라 하며 청중들은 완전히 몰입해 왔다. 마침내 온 나라 맹인이 개평으로 눈을 뜨는 대목에 이르자 일제히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낸다.
전 세계 구석구석의 토속음악이 그 본질을 그대로 지닌 채, 명실상부한 ‘세계의 음악’으로 각광 받고 있는 현장에 서서 다시 판소리의 세계화를 생각한다. 역시 관건은 정공법인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판소리 고유의 리듬과 선율,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시장에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인 것이다.
올해 영국 레딩에서 열린 워매드 페스티벌의 몇 장면이다. 왕기석 명창과 함께 공식 초청받아서 공연과 워크샵을 행하러 간 자리였다. 두 번 공연 하고 한 번 워크샵 치르고, 나머지 시간을 고스란히 월드뮤직의 바다에 풍덩 빠져 지내면서, 우리가 종종 자학적으로 되뇌어 온 판소리의 한계에 대해 다시 곰곰 생각한다. 그 어려운 사설을 누가 알아듣겠느냐? 지루하다, 너무 길다, 세태에 맞지 않는다 등등- 하지만 꼭 그런가? 정녕 돌파구는 없는가? 있다. 있을 뿐만 아니라 약점이라 생각하던 바로 그 부분이 열쇠가 될 수 있다. 역시 관건은 정공법인 것이다.
사설의 번역이나 영문 판소리의 개발, 서양악기로의 연주나 새로운 판소리의 창작 등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팝송을 필두로 해서 샹송, 칸초네, 삼바, 라틴, 탱고, 레게, 힙합 등의 음악은 전 세계 애호가들이 즐기고 있지만, 그 많은 토속어들로 이루어진 가사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즐기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연극이나 문학과 달리 음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가사 이전에 리듬과 선율을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닌가? 가사(사설)의 번역 문제를 두고 지나치게 강박관념을 가질 일은 아닌 것이다. 가사(사설)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또한 창작판소리 또는 판소리의 당대성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이어진다. 물론 당대의 현실적 문제를 담아내는 판소리를 창작하는 일은 절박한 문제이지만, 이것이 고전 판소리의 생명력이 이미 다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장 본질적인 것은 판소리 고유의 리듬과 선율,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시장에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인 것이다. 판소리의 장단은 지금 많은 이들이 열렬히 몰두하고 있는 다른 나라 월드뮤직의 리듬과 견주어도 매우 다채롭고 흥겹다. 대체로 한두 가지 리듬으로 하나의 곡을 만들어내는 웬만한 월드뮤직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거기에 판소리의 근본적인 매력이 숨어 있다. 세계화를 위한 노력의 맨 앞자리에 이 리듬의 독창성과 현란함을 내세우면 어떨까?
판소리의 장단은 이른바 이분박(duple rhythm)과 삼분박(triple rhythm)을 넘나드는 독특한 구성을 자랑한다. 한 시간 남짓한 공연이라면, 청중들은 그 다양한 장단의 흐름에 몸을 맡겨 둔 채로 눈을 감고 건들거리며 즐기기만 해도 충분하다.
선율 또는 성음에 있어서도 판소리는 다른 어느 음악장르에 뒤지지 않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그 수련과정의 혹독함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판소리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창법으로 사람 목소리의 높고 낮은 구석구석을 두루 활용한다. 거기에 의성어, 의태어를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그려 낼 듯한 묘사력을 자랑한다. 한 마디로 인간 목소리의 한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매력이 있다.
줄거리는 어떤가? 이른바 전승오가 판소리들은 이미 문학적 보편성을 인정받은 명작이라 해도 무방하다. 계층을 뛰어넘은 사랑이야기(춘향가)나 희생과 재회의 가족 이야기(심청가), 선한 의지를 통한 고난의 극복(흥보가) 등의 주제와 스토리는 시공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여기에 여러 세대를 거쳐 오며 첨삭가감의 과정을 거친 이야기의 극적 안정성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스토리상의 장점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무엇인가? 월드뮤직의 보편적 특징과 견주어 새로운 판소리 공연 형식을 개발해 낼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본다.
하나, 대목소리의 전통을 되살려낸다. 짧은 소리를 여러 편 들려주는 방식으로 지루함을 피할 수 있다. 물론 사이사이에 해설과 재담을 곁들이면 더욱 좋다.
둘, 입체창과 수성반주의 방식을 복원, 개발해낸다. 적어도 남녀 두 사람 이상의 창자를 통해 이야기가 있는 노래로서의 특성을 강조하고, 타악과 현악, 관악기가 형편에 맞게 수성반주로 곁들여지면 우선 초보적인 ‘판소리 밴드’로서의 면모도 갖출 수 있다.
셋, 편곡, 연출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른바 눈 대목이라 할 몇 개의 대표적인 곡들을 골라서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창작곡으로 재창조해낸다. 물론 원곡의 음악적 본질을 철저히 살리면서 전통악기와 현대악기의 장점을 두루 곁들이는 방향이어야 한다. 여기에 원곡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할 만한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아트’ 등의 연출적 장식을 가미한다.
넷, 춤을 곁들인다. 소리꾼이 발림을 적극적으로 연장한 약간의 춤동작을 개발, 선보이는 방식이 가장 좋다. 하지만 전문적인 춤꾼이 백댄서처럼 참가하는 방식도 고려할 만하다. 무대 위에서의 역동적인 춤 동작은 청중을 열광하게 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장치이다.
결국 적게는 3-4명, 많게는 9-11명 가량의 소리패(판소리 밴드)를 만들어 새로운 공연형식을 개발하는 일이 판소리의 대중화, 세계화의 중요한 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통예술이 본질을 잃지 않고 당대의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축복이자 숙제인 판소리는 그 태생적 발랄함, 창작 과정의 유연함 덕분에 시대가 바뀌어도 낯선 청중들과 충분히 소통할 만한 많은 길을 그 스스로 지니고 있다. 그 원래 있던 길을 모른 척 막아두고 있지도 않은 원본을 고수하려는 자세만 아니라면, 당대뿐만 아니라 미래를 이끌어갈 참신한 예술로 얼마든지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