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9 |
조팝꽃같이 환한 아이들만이 희망이다
관리자(2006-09-11 14:19:49)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에게』 이용범 시집 (모아드림, 2006)/// 글 | 김성철 시인/// 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다
말이, 시가, 배설물조차도
행여 상처를 주지 않을까
눈 버리지나 않을까
오물을 뒤집어쓰지 않을까
십일 년 만에 시집을 내는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두려움 가득 품은 아이처럼. 하지만 시인이 두려운 건 타자의 눈초리가 아닌 시인의 현실이다. 시인의 눈에 비친 고향, 세상 그리고 역사가 그의 가슴에서 뱀처럼 똬리를 튼 채 피멍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늘 그런게다. 날아오르지 못하는 풀잎을 보며 함께 울어주고 술잔을 기울이며 잎사귀의 소소대는 사연을 들어줄 수 있는 것.
시인의 뿌리는 줄포이다. 어선 가득 바다와 갯벌의 냄새가 그득그득 들어차 자진모리장단을 흥얼거리던 포구가 아닌 황혼녘 빛바랜 햇살만이 담벼락에 달라붙어 제 몸을 말리는 포구.
포구는 이미 자신이 더 이상 포구가 아닌 줄 압니다
뱃길은 진작 지워진 손금이고요
메마른 갯벌에 햇살은 차라리 서럽습니다
봄입니다
빈 포구에 물결 대신 봄바람이 일렁입니다
갈대는 그리움으로 흔들립니다
떠난 사람은 남은 사람에게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에게
그리운 편지를 씁니다
나문재가 불긋 파릇한 글씨로 마른 갯벌에 받아씁니다
ㅊㅏㅁㅁㅏㄹㄹㅗ
ㄱㅡㄹㅣㅂㄷㅏㅇㅣㅇ
-「줄포에서 보내는 봄 편지」전문
이용범 시인은 물결만 남아있는 포구를 우리에게 말하려는 게 아니다. 시인은 떠난 이들에게 ― 이젠 어엿한 도시인으로서 아스팔트를 밟으며 그르렁대는 어선보다 시커먼 배기가스 휘날리는 자동차의 배기통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 편지를 띄우는 것이다. 『너를 생각는다』(세시 刊, 1995) 이용범 시인의 첫 시집에서 줄포는 옛 기억의 산물이자 과거로의 회귀적 성격이 강한 흑백필름인, 반면에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에게』(모아드림 刊, 2006)서의 줄포는 ‘이미 자신이 더 이상 포구가 아닌’ 순응과 ‘빈 포구에 물결 대신 봄바람이 일렁’이는 현재의 즉 자연만이 남아 있는 줄포이다. 그러므로, 편지는 시인 자신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텅 빈 포구가 봄바람에 일렁이다 갈대로 구체화되어 흔들리며 갈대는 다시 나문재로 전이되어 떠난 사람에게 혹은 우리에게 긴 사연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줄포엔 그리움만 있는 게 아니다.
새만금 갯벌죽이기 공사로
망둥어 꼴두기 죽거나 떠나고
이젠 핵 폐기장 유치로
망둥어 꼴두기 같이라도 아둥바둥 살아 보려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야 된다 그리하여
산 들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부안은
서해 해넘이가 멋진 부안은
채석강은
변산해수욕장은
천혜의 내변산 외변산은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죽음의 땅이 될 것이다
-「2003년 여름, 부안에서」부분
처럼 죽음이 횡횡한 부안이 있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발전의 논리를 앞세워 생명의 보금자리를 뺏고 남은 사람들마저 고향을 등 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의 부안과, 거기에 핵 폐기장 유치가 더해져 봄바람 일렁이고 햇살이 뛰노는 갯벌이 아닌 남아 있는 생명에게마저 죽음을 선사하고 있는 현실의 변산반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은 자본의 논리로 황폐화되는 자연에 대한 경고로 ‘쓸쓸한 죽음의 땅이 될 것’ 이라고 단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 이용범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거나 동참을 호소하지 않는다. 「눈 내리는 부안」「부안의 가을」「눈 오는 날이면 내소사에 오라 하네」등의 작품을 통해 부안이 지닌 아름다움과 죽음이 닥친 현실적 부안을 대비시켜 독자에게 자본과 개발의 모순점을 부각시킨다. 또한 「나는 오늘」에서 “나는 오늘 부안의 희망을 보았다 / 부안수협 앞 뜨거운 아스팔트에 앉아 있는 아줌마들의 머리띠에서 // 나는 오늘 부안의 미래를 보았다 / 볼 붉은 어린 아이들부터 교복 입은 앳된 학생들의 불끈 쥔 주먹에서”처럼 그리움과 죽음이 도사린 줄포에 희망도 참게처럼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듯 시인 이용범의 시선은 일상적이면서도 일상에 가려진 것들에 대해 바라보며 아파하고 공감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시선은 26편의 연작시인 ‘지운 김철수’ 시편들에서 더욱더 두드러져 보인다.
1915년 비밀결사
열지동맹裂指同盟
이듬 해 신아동맹단
결성했습니다
중국 조선 대만의 동지들과 반일 반제 연대 투쟁 선언이었습니다
귀국 후 사회혁명단을 조직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함께 일제를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지운 김철수·4」부분
지운 김철수(1893~1986)는 국내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면서 일본·러시아·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며 1920년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지낸 조선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핵심인물이다. 지운 김철수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을 택하지 않은 채 남한 땅에서 산 아이러니한 인물이자 현대 한국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용범 시인은 「지운 김철수·1」에서부터 「지운 김철수·26」까지 이어지는 서사적 구조의 틀에서 거물인사의 업적이나 그의 치적을 쫓는 것이 아닌 그의 일상적 면모들을 바라보며 우리 현대사의 굴곡진 습곡을 어루만지고 현실 세대가 나아갈 방향까지 내보이고 있다. 「지운 김철수·8」에서 ‘이웃들을 사랑하며 /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습니다 ’, 「지운 김철수·9」‘고향에 내려와서도 / 그의 화두는 통일이었습니다’ 등의 현실 세태에서 무관심하거나 팽겨 쳐진 것들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한편,
어릴 때 교육이 중요한 거여 요새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반공 교육만 하니 머리가 클 수가 있겠냐고 내가 어느 마을을 가는데 멸공마을이라고 간판을 달아놓았어 멸공이 뭐냔 말이여 원래 좌나 우가 같이 필요한 거여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어야 발전하는 거지 통일하려면 좌 우익 진보 보수 가리지 말고 멀리 보고 강물 흐르듯이 함께 가야는 것이여
-「지운 김철수·11」부분
현대 역사의 일그러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침을 하며 현대 지성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역사적 안목으로 과거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 역사의 근본적 뿌리를 과거에서 찾고 수정 보완하고자 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발로이며 과거와 현대를 동일시하여 조건반사를 통해 미래를 가늠하는 척도로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연작시 이외에도 「박금순」「김용화」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편들이다.
이렇듯 시인은 자신의 뿌리인 줄포의 현실부터 당대의 아픔인 새만금 간척사업 핵 폐기장 건립 등 일상적 시선을 지닌 채 독자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한편, 「나의 교단」「아이들만이 희망이다」처럼 시인 자신이 처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고민과 현실 인식을 통한 새로움 추구 및 나아갈 점을 독자에게 되물음으로써 일상적 한 개인의 시선이 우리의 가슴으로 전이되어 끊임없이 진동시키는 힘을 주는 것이다.
김성철 | 원광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2006 영남일보 영남문학상 시부문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