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9 |
[전주시 삼천동 비아마을]백중날 -동네 술 맥이하는 날
관리자(2006-09-11 14:16:00)
내가 어렸을 때, 백중날이면 정초부터 키우던 닭으로 몸보신도 하고 여름 내내 땀을 흘려 쇠한 기운을 보충 했다. 어머님은 항상 어린 나에게 닭을 잡으라고 하셨다. 나는 닭을 죽이는 일에 익숙치않아 설 죽인채로 털을 뽑았다. 닭 털을 손으로 일일이 뽑고 나면, 닭은 완전히 털이 뽑힌 채로 마당이나 채소밭사이로 도망을 가곤 했다. 닭털을 다 뽑힌 닭이 마당을 활보하며 뛰어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이겠는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음력 칠월 15일 백중이면 동네에 술맥이가 벌어진다. 농사를 많이 짓는 집들에서 술과 음식 장만 비용을 추렴해서 동네잔치가 벌어진다. 아침부터 일찌감치 모정에 모여, 화독(일종의 야외 주방)을 설치하고, 개를 통째로 잡아 검정 가마솥에 끊이며, 닭도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양은솥에 삶는다. 모정 한켠에서는 여자들이 호박전 솔전도 붙이고 물외도 따다 술안주를 장만한다. 주장(酒場)에서 술배달하는 아저씨가 짐 자전차에 양쪽에 소두 한말짜리 2통개씩 네 개, 집바리 위에는 대두 1말짜리 막걸리 통을 2~3개 포개어 싣고 배달을 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보통 막걸리 대두 3~4통개를 먹었던 것 같다. 오후 무렵, 너무 취한 나머지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나고, 갑작스런 과식과음에 토하기도 한다.
오늘 하루는 동네 사람 모두가 실컷 논다. 하루 종일 일하지 않고 놀 수 있는 행복한 날이다. 이게 사람 사는 맛이고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다. 요즘 같으면, 보너스 받아 떠나는 유급 휴갓 날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주시 삼천동 비아마을에서 백중날 잔치가 열렸다. 오전 열시쯤 전주유씨 제각에서는 점심준비하느라 북적거리고 있었다. 마을공터에 모여 농기를 세워 기고사를 지내고 풍물패의 뒤를 따라 당산나무 밑에서 올해의 풍년과 마을민의 건강과 화합 백중행사의 성황을 기원한다.
지금의 삼천동 평화동은 옛날 전주부 우림면 난전면이었다. 우림면에서 ‘우’를 난전면에서 ‘전’을 따서, ‘우전면’이 되었다. 해방 후 난전면의 10여개 마을 주민들이 칠월칠석이나 백중에 술맥이와 합굿이라는 기접놀이 혹은 기전놀이를 했다. 1956년 마지막으로 중평마을에서 기접놀이가 열려 중평마을 농기의 60회 회갑잔치를 벌였는데 인근 11개 마을에서 참가하여 일주일간 계속되었으며, 당시 전주를 비롯한 김제, 임실 등에서 1천여 명의 구경꾼이 몰렸다고 한다니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 후 전승이 끊겼다가 1997년 전주시 삼천동 계룡리(비아, 정동, 용산, 함대마을)를 중심으로 전주기접놀이 보존회가 창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전에 비아마을에서 당산제와 만두레 행사를 하고, 오후 늦게까지 삼천둔치에서 기접놀이가 열렸다. 모든 행사가 끝난 후, 주변 마을을 아우르는 상쇠가 전체를 이끌며 대동굿을 펼친다. 상쇠는 80이 넘은 심씨 할아버지도 평소에는 활동이 부자연스럽지만, 꽹과리만 들었다 하면, 신명(神明)이 난다고 한다. 올해에도 온 풍물패와 인근마을 사람들은 열광의 환호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땀이 비오 듯 젖어 마치 개울물에 빠졌다 나온 듯 겉옷까지 다 젖는 삼복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명으로 이끌어,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지칠 지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마음으로 엮어내 마음이 후련하고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 백중날 기접놀이였다.
서울의 강남 같은 삼천동, 평화동에서 이런 공동체 행위 예술이 이루어 질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