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9 |
[다가교]다리의 변천, 배움에서 치욕으로
관리자(2006-09-11 14:11:27)
글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전주의 남쪽과 서쪽을 감싸고 흐르는 전주천은 전주사람들에게 단순한 자연 하천이 아니라 너와 나, 그리고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인식의 경계였다. 지금은 구 도심이라 부르는 옛 전주성 내의 공간이 가지는 ‘치소(治所)’와 성밖의 ‘주거지’의 구분이기도 했고, 때로는 중심과 변두리라는 차별의 경계선이기도 하였다. 천 너머 사는 것은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전주천은 삶의 패러다임을 구분짓는 ‘피안의 다리’로까지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런 때문인지 전주천이 갖는 공간은 만남이었다. 천의 이쪽과 저쪽의 사람들이 보이고, 전주와 타 지역민이 모여 생활을 공유하는 터전이기도 했다.
전주천에 놓인 다리는 분절된 인식을 이어주는 소통의 의미를 갖는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이어주는 물류의 소통과 사람과 사람들이 왕래하는 삶의 소통인 것이다. 옛부터 잇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능이 다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전주천에도 전주라는 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래 많은 다리들이 놓였고, 각각의 다리들이 갖는 소통의 의미는 조금씩 달랐다.
옛 사람들의 기억을 빌리지 않더라도 전주천에서 풍광이 좋은 곳이라면 한벽당이 으뜸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다가교였을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젊은 청춘 남녀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였던 다가산을 이어주는 다가교는 그러나 씁씁했던 우리 역사의 아픔을 담고 있기도 하다.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가교는 ‘사마교(司馬橋)’라 불리웠다. 조선전기 향교의 글 읽는 소리가 진전에 모셔진 이성계의 어진의 심기를 건드린다 해서 선너머로 이전했었는데, 향교를 왕래하는 학동들이 건너는 다리였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향교에서 공부를 했던 학동들이 대개는 생원 진사를 뽑는 사마시험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사진 1>은 1910년대 초에 촬영된 것으로 사마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속 다가산의 정상과 공원 입구에 도리이가 있는 점으로 보면 전주신사가 들어선 1914년 전후의 모습이다. 다가산의 산자락이 하천에 맞닿아 있고 천 너머에는 제방이 쌓여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마교를 건너 왕래하던 학생들의 고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큰물이 지면 향교에 갈 수 없었고, 종종 호랑이가 나타나기도 했었다고 한다.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의 벌거숭이 산들을 보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실 1920년대까지도 전주에 맹호가 출몰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보다 수백이전에 다가산이 있은 유연대 자락은 울창한 숲이 있었고 맹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와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 도시계획이념이 적용되어 임진왜란 직후 향교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사마교의 의미는 다리만 남겨 놓은 채 사라져 갔다.
1914년 전주신사가 완공된 뒤 사마교는 신사를 왕래하는 일본인들의 참배 통로였다. 이런 다리가 1920년 홍수로 유실되어 버리자 박기순이 1만원을 기부하여 철근콘크리트 교각에 나무 상판을 얹은 다리가 새로 놓였다. 나무 상판을 얹은 이 다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1935년 4월 1만원의 돈을 들여 6월 새로운 콘크리트 다리를 세웠다. 총길이 58미터, 폭 7미터의 크기로 교각은 물론 상판까지 철근 콘크리트로 세운 다리였다. 전주에서는 전주교(싸전다리), 완산교에 이은 세 번째 콘크리트 다리였다. 다리 위는 아스팔트로 포장하고 각 기둥에는 보주를 얹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사진 2>가 바로 이 때 세워진 다가교의 모습이었다. 당시에 이 다리의 이름은 ‘대궁교(大宮橋)’였다. 대궁교는 전주시민들이 전주신사를 참배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리의 교각이 'H'자로 구성되어 있고 다리에 맞닿은 부분만 제방이 쌓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궁교라는 이름이 박기순이 새로 놓은 다리부터인지 1935년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박기순 때부터 그렇게 불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1936년 8월 대홍수로 이 다리의 1/3이 유실되어버렸다. 1년 남짓 수명을 다한 뒤에 일본은 본격적으로 다가교를 대폭 강화하였다. 이 위치보다 약 20미터 상류로 옮겨(현 다가교 위치) 1937년 3월에 총 길이 75미터, 폭 7미터, 공사비 2만2천360원을 투자하여 8월에 완공하였다. <사진 3>은 완공 직후의 모습이다. 이 사진을 보면 홍수로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의 좌우 천변의 제방을 튼튼하게 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제방을 튼튼하게 하지 않는 한 다리의 유실은 언제든지 재발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콘크리트 다리로 바뀐 다가교는 강제로 전주신사에 참배를 해야 했던 전주사람들에게 치욕의 다리이기도 했지만, 선너머 아래 자리잡은 신흥학교나 기전학교 학생들에게는 다리 건너 서문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신앙의 다리였다.(<사진 4>) 두 다리를 건너 오고 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상반된 이런 의미야 말로 우리 역사의 아픔을 생생히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