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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9 |
우리 아저씨들의 배신자 이재용! <다세포 소녀>
관리자(2006-09-11 14:06:13)
우리 편(?)에 대한 걱정 보셨는가. 강풀의 만화 「순정」을. 청년이 여고생에게 끝까지 존댓말을 쓰며 사랑을 이어가던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인터넷 만화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니. 그런데 여기 늦은 밤 숨어서 보기에 좋은 강풀의 정반대 19세 버전이 있으니,「다세포 소녀」! 이게 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호기심보다는 사실 걱정이 앞섰다. 글쎄,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어떻게 표현할까. 우리나라 관객들은 대체로 드라마를 중시하는데, 연속성이 없는 이 단편 컬트들을 모아서 과연 어떻게 완성된 스토리를 이어갈까.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정사> 등 제법 고급스런 멜러물을 만든 이재용이 노골적인 호르몬에 대한 만화에 손을 대다니? 뭐 이런 걱정들. 관객의 소망적 사고 보자. 무쓸모고등학교, 무종교 반에서 원조교제 약속에 의한 조퇴는 합법. 영어 교사가 성병에 걸려 결근했기에, 이 시간은 자습. 뻔뻔스럽다. 교사와 접촉한 학생들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조퇴가 이어지니 교실은 금세 텅 비게 된다. 말이 끊어지는 순간. 그런데 이 동네 선생은 이 같은 사태에 열을 받거나 설교하지 않고 다만 외눈박이라는 외모 때문에 총각일 수밖에 없는 머시매를 위로할 뿐.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축축하고 냄새나는 것들을 햇빛위로 끄집어 올리다니, 이재용의 스타트는 좋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김옥빈)'는 달동네 단칸방에서 병든 엄마(세상에, <진짜진짜 좋아해>의 임예진이라니!)와 동생을 챙기는 효녀. 소녀는 스위스에서 전학 온 부유한 안소니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이 꽃미남은 띨빵한 남학생 외눈박이의 동생 두눈박이(이은성)를 좋아하고. 그런데 두눈박이는 여장 남자 아니던가. 그렇다고 삼각관계가 중심축은 아니고, 가난 인형을 업고 다니는 김옥빈의 원조교제에서 발생하는 해프닝이 주 메뉴. 눈이 커서 천성적으로 타인의 동정을 자아내는 이 소녀는 피라미드 판매를 하는 엄마를 위로하고, 강제철거하려는 깡패들에게 ‘몸으로라도 빚을 갚겠다’고 제안하다 깡패에게 '너 그 따위로 살지 말라'는 주의를 듣기도 한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와 달리 잘 우는 소녀, 차별과 배제를 잘 받아들이는 소녀, 스타벅스를 마실 수 없는 이 늘씬한 여고생은 '처녀가 밥 먹여 주냐'며 모텔에 든다. ‘늦든 빠르든 여자에게 일어나는 결정적인 것들(친절한 금자씨 표현)’을 실천하려 아저씨 앞에서 옷을 벗는데, 허, 끈질기게도 가난은 등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 가난 인형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켜 비극의 정화 작용으로 가는가 싶었는데, 세상에 2인용 플레이스테이션 스틱으로 놀고 있는 꼴이라니. 다음 원조교제 타자는 조폭 두목. 그러나 이 왕칼 언니 역시 세라복에 유난히 집착하는 이성복장 애호가라서 코스튬 플레이로 사진이나 찍으며 노닥거리는 게 전부. 내, 대학 이론서에서 배우기론 주인공의 비범한 용기로 인한 고통이든 파멸로 가야하는데 감독은 비굴과 야비도 아니고 그저 웃고 말잔다. 허허, 이런 '사심 없음(이것을 낭만주의자들은 공감이라고 부른다)'이라니. 골 때리는 아이들의 성 취향에 대한 엿보기 혹은 일본풍의 난감함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참말로 김빠진 까스명수다. 이건 웃음을 통해 환멸이나 냉소를 표현하는 방식도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솔직히 관객의 소망적 사고는 이 소녀에게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라 최소한 세라복 안의 팬티 언저리일 텐데, 무심한 감독은 관객의 기대를 무시하고 비극의 모멘텀을 '흔들녀 댄스'로 설정한다. 결국 조폭 두목이 포털에 걸어둔 댄스녀 동영상이 최고의 조회수를 기록해서 옥빈은 부와 명성을 갖고 가난 인형을 내려놓게 되는데. 젊은 것들에 대한 아부 예의 없는 것들. 대학교만 들어가면 성형수술을 하는 이 아이들은 십 점만 더 맞으면 신랑 직업이 바뀐다고 믿는 것들. 홈피에 들어가 껄렁한 글이나 남기고 아웃백이 삶의 목표인 이 괘씸한 것들은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나왔다고 우기고 백의민족은 염색기술의 미발달 때문이라며 어른의 말씀을 애초에 믿질 않는다. 해서? 못난 선생이 취하는 방식은 자신의 알록달록한 빤스를 보여주면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라고 한다. 참나, 젊은 것들의 감춰진 꺼풀을 보려했는데 오히려 우리 편 아저씨의 야릇한 신음을 듣게 되다니. 그러니 이 싸가지들은 반성은커녕 카메라 폰을 눌러대며 까불어대지 않던가. 감독은 결국 이런 아해들에게 아부까지 덧붙이는데, 어떻게? 예이츠의 시,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을 읊어대는 것. 글쎄. 대사의 우아함과 시적 리듬을 위해 삽입한 듯한데, 영화는 시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만다. 순진의 전설 임예진과 나이 먹은 스타들을 망가뜨려서 얻은 15세 관람가는 영화 보려고 헌혈하는 아이들에 대한 아부일 뿐. 거기다 김옥빈 빼고 아해들의 연기는 <논스톱>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니, 솔직히 아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빨래줄의 늘어진 팬티, 재래식 화장실 다이빙으로 이어지던 지지리한 궁상은 막판에 개판인 학생들의 소요로 이어지는데 이것 또한 뜬금없다. 얘들이 개기는 이유는, 교장이 여학생 사타구니에 약을 놓아 범생이로 바꿔놓는 게 싫다는 것. 좋다. 여자애들만 왜 조신해야 하느냐는 질문은 수용하겠는데,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남학생들이 단체로 양풍신공을 위해 허리 아래로 손을 흔들어 대는 초식이라니. 먼 카메라로 잡았지만 이 집단자위 체조는 솔직히 역겹다. 괴물과 함께 드라마가 증발하는 데 대해서 감독은 그저 만화로 흘러가는 것을 내버려 둘 뿐, 이재용은 없다 짧은 교복치마에 일본 B급 무비를 지향한 듯한 캔디 필(feel), 분홍 가발의 뮤지컬 요소는 감각적 눈요기일 뿐. 옥빈의 춤 하나로 장사하는 것은 <몽정기>나 <색즉시공>의 또 다른 버전에 다를 게 없다. 눈물 흘리는 눈, 춤추는 몸, 소녀가 읊어대는 예이츠의 시 등은 조각난 퍼포먼스로만 가득 차 있어서 언어도단의 원작을 뛰어넘지 못한다. 콱 쑤셔대는 칼은 없고 그저 기이한 행동이 샤프심처럼 톡각톡각 나올 뿐. 그렇다면? <섹스 앤 더 시티>의 경쾌함이 어려웠다면, 처음부터 아부 접고 어둡고 칙칙한 19세로 갔어야 했다. 교복에 몸을 가두었지만 알 것 다 알고 별 짓 다하는 아이들의 치부도 드러내는 모험을 했어야 했다. 불순에 대한 옹호 혹은 퀴어로 가던지 아니면 성충동에 더 뻔뻔했어야 했는데, 자기보존충동에 머물고 만 이것은 다세포가 되지 못한다. 이재용은, 없다.   사실 관객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와 심리적으로 일치하는 것. 근데, 치마 아래의 어떤 판타지를 보여줄 듯 보여줄 듯하다가 결국은 사회나 어른의 위선에 대한 어정쩡한 풍자로 마무리 짓는 이재용은 같은 40대로서 배, 배신자다. 문근영의 대척점을 보려했던 야쿠자도 귀족도 아닌 이 단세포 아저씨들에게, 방송은 관두고 집안일(재벌의)에만 전념하겠다는 녹아버린 얼음공주에 이은 배신의 연장일 뿐. 에이 된장!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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