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9 |
아버지의 등을 가르쳐준 친구
관리자(2006-09-11 14:04:17)
글 | 이정록 시인
내 친구 가덕현, 가다 서다 대학을 십 년이나 다녔다. 그러니 군 생활을 빼더라도 그는 칠 년 가량은 캠퍼스 근방에서 살았다. 젊음이란 게 무엇인가? 갈 곳은 많고, 잘 곳과 먹을 것은 변변찮다는 뜻 아니던가? 누습한 내 청춘의 방황에 그는 따뜻한 밥상이 되어 주었고 깊은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후처의 자식이었던 그는 이러저러한 싸움 끝에 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다. 제 주변머리도 챙기지 못하는 가난한 대학생이 말이다. 그런 그가 생계를 위해 꾸린 살림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라는 주점이었다. 어머님께서 만든 김밥이 있었고 토속적인 실내장식(거의 새벽 길거리에서 끌어다 놓은 기가 막힌 전리품들)이 있었으니, 우리들은 그곳을 카페라고 불렀다. 그러나 늘어나는 것이 외상이고 북적거리는 것들이 허기진 손님뿐이라서 가계는 하루가 다르게 제살 다 파먹고 뼈를 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금강 둑에 나가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저 강이 노을을 업고 가듯, 산 그림자를 겹겹 들쳐 업고 가듯, 별빛과 물새들의 작은 발목을 흔들며 가듯, 우리 또한 부실한 마음자락에 무엇인가를 업고 가야 하리! 마음 다잡으며 술잔을 부딪쳤지만, 나무젓가락처럼 마른 도랑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때 우리가 떼 메고 가는 것은 향방 없는 울분과 막연한 서글픔과 취한 어깨뿐이었다.
드디어 그가 졸업을 하고 발령이 났다. 벌써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흔적도 없이 어둠 속으로 잠긴 뒤였고 가진 것은 오래된 밥그릇과 노부모님뿐이었다. 그와 나는 마을을 훑기 시작했다. 폐가를 얻기 위함이었다. 며칠을 쑤시고 돌아다닌 후, 결국은 우리 집 바로 윗집을 얻게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멀리만 생각을 했지, 이웃집이 비었다는 것은 깜박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객지에 나가 있는 나 대신에 새 아들이 들어왔다고 기뻐하셨고, 말벗까지 이웃하셨다고 꽤나 즐거워 하셨다. 나도 고향 가는 길이 이를 데 없이 즐거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당숙모께서 전화를 주셨다. 아버님이 매우 취하셨는데, 네가 오지 않으면 집에 안 가신다니 빨리 택시 타고서 오라는 말씀이셨다. 이십 리 길을 부리나케 가보니 아버지는 인사불성이셨다. 그렇게도 무겁게만 보였던 아버지가 얼마나 가벼운지를 그때야 알았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 어머니는 참으로 가볍다. 체온만 업히시기 때문이다.
“큰애야. 아버지 무겁냐? 엊그제는 덕현이가 날 업고 여길 넘었다. 걔도 날 업고 넘는디, 아들이 셋이나 되는 내가, 남의 등에만 업혀서야 되것냐? 덕현이가 네 등판 따라올라먼 멀었다야. 이 애비가 노래 하나 더 부르랴!”
덕현이가 아니었으면 나는 평생 아버지를 업어보지 못했으리라.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아버님은 설암으로 세상을 뜨셨다.
나에게는 울음이 타는 아버지의 등을 가르쳐준 친구가 있다.
이정록 |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의자」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과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