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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9 |
칠월백중 전주기접놀이
관리자(2006-09-11 14:03:17)
삼천 강물에 솟구치는 농기의 용트림 현장 글 | 김성식 문화저널 편집위원 현 전주시 삼천동 일대는 삼천천을 중심으로 아파트 밀집지역인 도심동과 농업지역인 농촌동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이 지역의 농촌동 마을은 벼농사와 함께 복숭아 재배가 활발하다. 평화동 일대도 구이방면으로 펼쳐진 평야를 따라 열대여섯 마을의 농촌동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여전히 벼농사가 중심이되 미나리 재배와 함께 2모작하는 농가가 꽤 있다. 그래서 8월 하순인데도 추수를 시작하고 있다.   이 두 지역의 공통점은 참으로 많다. 우선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우림면과 난전면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1989년 전주시 행정구역 개편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지속적인 확장과정에서 전주시로 편입된 지역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 서곡지구, 평화 삼천지구를 중심으로 전주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이미 상당한 자연마을이 해체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마을이라 할지라도 앞으로 어느 시기에 삶의 터전이 바뀔지 알 수 없는 지역이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물론 개발시기를 전후해서 이미 몇 차례 땅투기 바람이 지나갔다는 점도 다르지 않다.   농사짓는 조건도 똑 같다. 벼농사의 관건인 물 문제를 해결한 것은 40여년도 안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지역의 경지정리는 대부분 30년쯤 전에 이루어졌으며 (평화동 장교리의 상호네 어머니 왈, 동네 경지정리하면서 당산을 없애버려 당산제가 중단되었으며, 우리 상호가 지금 서른여덟인데, 갸가 국민학교 입학할 때 경지정리로 땅이 하도 질어서 장화 사 신겨 보낸 기억이 있다고 한다) 수리조합에서 구이저수지를 축조한 시기(1960년에 착공하여 1963년에 준공되었다)도 이에서 멀지 않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지금처럼 제방도 없어 가뭄에도 대책 없고 홍수에도 대책 없는 농촌이었다. 가뭄 때 고작 한다는 것이 주민들이 보릿대 들고 앞산 봉우리에 올라 기우제 지내는 정도였다. 삼천은 구이면 평촌 덕적에서 내려오는 덕적천, 구이저수지에서 내려 보내는 구이천, 모악산에서 내려오는 중인천 등 세(三) 내(川)가 모여 이룬 천이다. 구이저수지가 없던 그전에는 가뭄이 삼년에 한번 꼴로 잦았는데, 당시에는 논물 확보를 위해 곳곳에 보를 막았다. 보(洑)는 천을 경사로 가로질러 소나무 말뚝을 박고, 나뭇가지 등 거섶으로 초벌을 막은 후 흙을 담은 가마니로 둑을 쌓는 방식이다. 이렇듯 보막이로 물길을 돌려 논에 물을 대던 시절, 삼천천 일대에는 구이 두방리 밑에 있던 상객기보, 동적골의 수정보, 신평마을 위에 있던 조하보, 중평 뜰로 내려보내는 거마보, 장교리 취수장 옆에 있던 괭이보 등 수많은 보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장마나 홍수에 다 떠내려가면 다시 보를 막는 보맥이(洑役事)는 부역 중의 부역이었고, 보를 관리하는 보주(洑主)는 벼슬 중의 벼슬이었다. 즉 이 일대는 과거에 보를 중심으로 농사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유다른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 일대의 공통점 가운데 문화적 가치 면에서 농기(農旗)로 펼치는 ‘깃점’(또는 ‘기전’) 만한 것이 없다. 깃점은 근래에 ‘기접놀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술멕이 즈음해서 벌어지던 농경풍속이다. ‘깃점(旗點)’이라고 할 때는 ‘기 점호’가 본디 뜻이며, ‘기전(旗戰)’이라고 할 때는 ‘기싸움’을 의미한다. 삼천동과 평화동 일대에서 ‘큰기’와 ‘두레’가 없었다는 마을은 거의 없다. 우리 민족의 기는 신대(神竿)와 농기의 상징인 용기(龍旗)에서 출발한다. 보통은 농신기, 용신기, 용당기 등으로 부르는데 이 근동에서는 그냥 ‘큰기’라고 부른다. 이 기는 농경문화의 상징이고, 마을 주민들의 정통성과 존재감의 상징이다. 따라서 용기의 역사는 마을의 역사이고, 마을의 역사는 자긍심의 근원이다. 뿐만 아니라 용기는 단합의 상징이다. 용기가 내걸리면 두레, 기우제, 술멕이 등 어떠한 형태로든 단합을 요하는 회합과 노동의 장이 마련된다. 용기는 과히 농경문화에 뿌리를 박고 천상천하를 주유하는 용트림의 기상, 그 자체이다.  큰기에는 보통 용이 그려져 있다. 또 그 주변에는 거북이와 잉어도 보인다. 이들 동물은 모두 물과 관련되고, 이는 당연한 수신(水神)의 상징이다. 큰기 그림은 주민들의 염원을 모두 담고 있는 민화적 세계가 가득하다. 장교리 큰기는 모정을 새로 짓고 낙성식 때에 맞추기 위해서 미리 화가를 불러 숙식제공하며 그렸는데, 자그만치 한달이 더 걸렸다. 그 해가 1962년이다. 이 일대에는 소화 2년(1927년)에 그린 기를 비롯해서 아직도 십여 점 이상의 용기가 전해지고 있다. 용기는 마을의 위상과 비례하는 만큼 가능한 크게 제작한다. 또한 그림도 그렇지만 기폭 둘레에 지네발이라는 장식과 흰색으로 제작한 깃수건 등 치장도 매우 화려하다. 용기를 매단 장대 끝은 꿩장목으로 치장한다. 즉 장대 끝을 꿩 깃털을 묶어 장식함으로써 용기 자체는 단순한 물체에서 인간과 하늘을 매개하는 새, 또는 신단수로 뒤바뀐다. 신화와 주술의 세계를 담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기의 핵심은 기의 제작년도 및 관련사항을 기록한 연조다. 연조는 기의 왼쪽 끝에 세로로 기록한 일종의 호적이다. 삼천동 하봉마을 용기에는 『단기(檀紀) 4299년(丙午) 7월 15일 조성. 좌상(座上) 양한열, 공원(公員) 유형인 양근희, 유사(有司) 박기순 양정희, 下鳳理』라고 씌여 있다. 용기가 훼손되어 다시 그릴 경우에도 이 연조만은 그대로 새 기에 옮겨 부착한다. 기의 나이에 의해서 형과 동생마을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조가 완전히 마모되지 않는 한 한번 형님은 계속 형님이다.   기접놀이를 보면 농촌에서 농사짓고 살아온 순박한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 그것은 한마디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자유롭고 보다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란 공동체적 또는 집단적 삶을 지향하는 세계관이며, ‘보다 자유롭게’에는 상하의 계층이나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평등한 삶을 실천하는 민중적인 의식이 투영되어 있으며, ‘보다 풍요로운 삶’에는 생산적인 활동을 통하여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극히 보편적인 지혜가 담겨 있고, ‘지속 가능한 삶의 양식’에는 자연과 환경을 고려하는 생태농업에 기반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멀리 부족국가시대에 본디 ‘소도’(蘇塗)라는 신성한 공간의 상징인 솟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파악되는 용기의 역사성과 신성성은 그래서 장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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