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9 |
김학수 사진전 [방앗간 四季’]
관리자(2006-09-11 14:02:08)
흑과 백의 이분법을 뛰어넘다
글 | 김정기 KBS전주방송총국 PD
“저 방앗간에 강아지 좀 봐, 귀가 쫑긋하네”
‘방앗간 四季’ 사진전을 찾은 불혹 중반의 여인들의 이야기다.
30여점이 전시된 흑백사진 속에서 ‘혹은 고향을 보았고, 혹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았다’고 한다.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아련히 들려오는 새벽 香이 담겨있다.
정초의 하얀 눈 사이로 ‘설 명절 떡 방앗간’이 단내 그윽한 겨울풍경(風景)으로 우뚝 섰고, 황량한 들판 가운데 외로워 보이는 방앗간은 ‘울음 그친 맴생이’가 때 이른 봄소식을 전한다.
저 멀리 김제들녘 끝 죽산의 어느 방앗간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여름 땡볕 무더위에 지친 농군들에게 낮잠 한 소금 할 장소론 제격이다. 그리고 방앗간 앞마당 나락 더미와 할머니의 갈퀴질에서 누렇게 무르익은 가을이 펼쳐진다. 소복하게 눈 쌓인 배추와 용담호 물밑 방앗간은 이제 한해를 아득한 고향으로 마무리한다.
흑백사진(黑白寫眞) - 실물의 형상을 검은 빛깔의 짙고 옅음으로 나타내는 사진.
흑백(黑白) - 검은색과 흰색
옳고 그름
흑인과 백인
…
흑백논리(黑白論理) - 모든 문제를 흑과 백, 선과 악, 득과 실의 양 극단으로만 구분하고중립적인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려는 편중된 사고방식이나 논리.
흑백에 관련된 사전적인 의미들이다.
선생은 지난 50여 년을 흑백사진만을 고집해왔다. 그런데 그 고집스런 사진 속에는 상징적 의미의 유난스런 고집이나 편견이 없다. 매갈잇간, 물레방앗간, 정미소에는 강아지, 맴생이, 동네아이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저 흑과 백, 빛과 그림자로 읽혀지는 그의 작품은 2분법적 구도를 슬며시 뛰어 넘는다.
지극히 단순화된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일 뿐이다. 흑백 두 가지 색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가지 색만 사용하여 그린 그림인 ‘단색화’ 즉, 모노크롬(monochrome)이다. 그렇다고 노출을 극단적으로 이용해 흑과 백을 반전시킨 솔라리제이션(solarization)도 아니다. 아날로그에서 21세기 디지털시대, 디지털사진 속에서 다시 찾는 그냥 한 가지 빛깔, 하얗디하얀 빛 천국이다. 오로지 그의 눈을 통해 투영된 농촌의 풍경을 만나며 느끼는 ‘아늑한 고향’만 있을 뿐이다.
십수 년 전, 전주대 도서관 기둥사이로 뒤뚱거리며 걷던 사진 속 아이들과 무주리조트 들꽃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가족사진은 오늘의 선생과 나를 떠올리게 하는 가족의 따뜻함이다. 선생은 나에겐 한 세대를 뛰어넘는 친구이자, 아버지 같은 분이다. 선생은 처음 만난 이십년 전에도 혼자였다. 그리고 지금도 혼자다. 출가한 세 딸과 아들하나 모두 미국과 서울에 따로 떨어져 산다. 올핸 방앗간 사진전을 계획하곤 매년 4월이면 찾던 미국 시카고 딸집 방문도 취소했다. 단지 서울의 아들만 전시회에 찾아왔다.
선생은 하얀색 사진집을 만드신다한다. 50년 사진인생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하고 싶다 하시는데……. 몇 해 전 칠순 당시, 주변의 많은 이들이 조촐한 고희 잔치 겸 사진집 발간을 계획했을 때 선생은 미국 딸네 집에서 푹 머물다, 아주 늦게 돌아왔다. 그리고 끝내 사양했다.
“벌써 사진집, 아니여 아직은 빨라, 좀 더 있어야 돼” 그랬다. 그런 그가 사진집을 만든다한다.
지난 86년 미국 시카고 시장 초대전으로 선생의 작품이 선보였을 때, 이역만리 어려운 생활에 지친 동포들은 고향의 그리움을 사진으로 달랬다. 2001년 중국 연변의 ‘무주촌 사람들’ 다큐멘터리 사진전은 전주와 무주 등 한국에서 잊혀진 60년과 중국 동포들의 잃어버린 고향을 하얗게 복원해 줬다. 이제 그는 또다시 중앙아시아 키르기즈 ‘고려인들의 유랑의 아리랑’을 지난해부터 담아오고 있다.
선생은 얼마 전 평화동의 한 팰리스(palace)로 이사했다. 이름하여 OO궁 아파트, 궁전에 사신다. 방 3개 아담한 주거공간 안방엔 먼저 카메라가 침대 옆 나란히 줄맞춰 놓여져 있다. 거실에는 연대별 걸작 사진들이 걸려져 있고, 문간방은 그의 작업 전부를 함께 할 수 있는 암실로 꾸며졌다. 어둠이 없는 단아하고 하얀 빛의 집이다.
방앗간 四季를 통해 “그저 사진이 좋아 들녘, 산기슭을 헤맸던 50여 년의 사진과 세월, 그 속에 우리 민초들의 삶을 사각의 앵글에 담고 싶었다‘는 그는 오늘도 일흔 넷 청년의 넉넉함으로 전라산천을 사진기 하나 달랑 메고 나섰다.
PS: 선생과 필자와의 만남은 20년 전 지금은 없어진 도청 앞 ‘얼화랑’이었다. 그때 PD는 이십대 후반의 애송이 총각이었고 선생은 머리가 새까만 5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지금 PD는 40대 후반의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작가는 70대의 하얀 머리 할아버지가 되었다.
김정기 | 1987년에 KBS에 프로듀서로 입사, 1995년부터 KBS전주방송총국에서 일했다. 그동안 ‘무주촌 사람들’, ‘키르기즈 아리랑’, ‘볼보그라드 한인들’, ‘천년을 숨쉰다 한지’, ‘한국의 빛 오방색’, ‘백제의 노래 정읍사 서동요’ 등 민족문제와 지역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20여 편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