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9 |
[흑백사진]왜 맨날 흑백사진만 찍어?
관리자(2006-09-11 13:58:57)
“빛 바랜 흑백사진같은 옛 추억-”
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왜 흑백사진은 옛 추억을 생각나게할까? 흑백사진은 왜 빛이 누렇게 바래야 더 세월의 두께를 느끼게 하는 걸까?
“사진의 깊은 맛을 알려면 흑백사진을 해야한다.”는 말을 막연한 느낌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진을 시작했다. 벌써 20여 년 동안 장날을 흑백사진으로 표현해왔다. 한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왜 맨날 흑백사진만 찍어?”
사진의 특성중 하나가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래도 보여주는 사실성이라면,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색 자체를 재현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흑백사진은 사물의 본래색을 흑백으로 재해석한 하나의 추상사진이다. 색채가 사상(捨象 : 어떤 사물의 현상에서 본질 이외의 불필요한 요소를 버림)되었다는 점에서 추상적이다.
흑백사진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느낌은 피사체의 윤곽이지 전체의 모습이 아니다. 그 윤곽은 나름대로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그 성격이란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필요한 부분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본질 즉 리얼리티(reality)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사물은 시지각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물의 외관은 크게 두 가지를 통해 우리에게 강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즉 형태와 색채이다. 어떤 사물은 형태보다 색채 자체를 통해 우리에게 감정을 전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색채 때문에 그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흑백사진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직접적인 길로 인도한다.
장날같은 다큐멘터리 사진은, 컬러보다 흑백사진이 장터에 깊게 배어있는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더 절묘한 효과를 준다고 생각한다. 잡다한 색깔들이 자칫 장에 있는 사람들의 정감을 가리우거나 산만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장날을 흑백사진으로 찍어왔다.
흑백사진을 수묵화와 비교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옛날 사람들은 인간의 정서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속성에 절망하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래서 겉에 드러난 외양에만 현혹되지 않았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나 아름다운 자연도 영원하다고 보지 않았다. 현상은 변화하는 것이고, 위대한 것은 오로지 거기에 깃든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보았다. 그림이란 자신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형태 자체에 너무 억매이지 않았으며, 특히 현상 속의 색채효과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으로 점차 색채를 배제하고 ‘수묵으로 그린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수묵화는 난만한 채색화의 단계를 지나 원숙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수묵화에 사용하는 먹물은 무채색이다. 무채색이란 “색깔이 없다. 색깔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실제 검정은 화려한 보색의 안료들이 합쳐서 이루어지거나, 광선에서는 모든 빛이 소멸되고 없어진 상태에서 드러난다. 검정색, 회색, 흰색의 무채색은, 모든 유채색이 색을 잃어버리면 남겨져 나타나게 된다. 이렇듯 모든 색은 언젠가 바래고 없어진다는 것은 동양적 사고의 하나이다.
무채색은 온갖 색이 바래서 화려함을 잃은 모습이다. 무채색은 모든 색의 소멸로 이루어지지만, 또한 모든 유채색이 시작되는 근원이기도 한다.
무채색은 참으로 신비하다. 그것은 다채로운 색들이 화려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르게 되는 노년의 원숙함과도 같은 색이다. 무채색은 지극히 순수하고 소박해서, 내면의 정신적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스님들의 승복이 회색이고, 신부나 수녀들의 복장이 무채색인 것이다. 무채색 중 검정색은 색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색이기도 하다. 패션 중 가장 세련된 옷이 검정색이고, 최고급 승용차의 색상이 주로 검정인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수묵화는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사물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드는 철학적 양식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흑백사진은 이런 면에서 수묵화와 같은 무채색의 정신성을 가지고 있다. 흑백사진과 수묵화의 이런 공통점 때문에, 나는 장날을 흑백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흑백사진은 현란한 색에 현혹되어 피사체의 본질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하지 않는다. 다채로운 컬러는 처음에는 산뜻하고 시선을 강하게 자극하지만 오래 지나면 질리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흑백은 처음에는 담백해서 무덤덤하지만, 오래볼수록 새롭고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좋은 사진이란 오래두고 볼수록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어야 한다. 사진에서 흑백은 얼핏 두 가지 색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흑과 백 사이에는 다채로운 컬러의 종류보다 오히려 더 다양하고 미묘한 톤의 차이가 있어 사물의 깊이를 더 느끼게 해준다.
흑백사진은 가장 강렬하면서도 세련된 톤(tone)으로 다채로운 인간의 삶을 그려내는데, 최선의 표현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흑백사진은 현상·인화 등의 모든 것을 사진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해야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 이런 과정이 번거롭고 힘이 들어 흑백사진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물론 흑백사진 자체를 아예 피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흑백사진 자체가 마치 무슨 신기한 나라의 이야기처럼 여겨지는지 모르겠다.
이흥재 |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우리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미술사적 시각에서 다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장날 사진을 찍어왔다. 『장날』, 『그리운 장날』, 『그리고 구멍가게가 생기기 전에는』의 사진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