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8 |
『간찰』 (심경호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 2006)
관리자(2006-08-08 11:55:39)
“왜 벗과 사귀는 공부를 하지 않는가?”
글 |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
간찰은 전통시대의 편지를 가리키는 말로 원래 죽간(竹簡)과 목찰(木札)에 작성한 글을 통칭하여 부르는 용어였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을 대나무나 나무를 얇고 가느다랗게 깎아 그 위에 썼는데 전자는 죽간, 후자는 목찰이라 불렀다. 종이가 발명된 후에는 그 편리성 때문에 대나무나 나무를 깎아 쓰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대나무나 나무를 의미하는 간(簡)이나 찰(札) 및 독(牘)이라는 말을 붙여 서간(書簡), 서찰(書札), 서독(書牘) 및 간찰이라 하여 편지를 뜻하기도 하였다. 대나무와 나무를 한 자[尺] 크기로 잘라 썼기 때문에 척독(尺牘)이라고도 했으며 또 취향에 따라 비단에 편지를 써서 백서(帛書)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들은 모두 간찰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간찰은 상대방을 만나지 않고 글을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 깍듯하게 예우를 나타내야 했으며 자신을 겸양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소한 용어 한 두 마디로 커다란 오해를 낳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 수단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전통시기에는 의사소통을 대부분 간찰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중국 송나라의 철학자 정호(程顥)는 “서찰은 선비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친숙하게 해야 할 일이다(至於書札, 於儒者事, 最近)”고 했다. 조선조 선비들은 그림이나 골동에 매몰되는 것을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경계하였으나 간찰만은 예외로 했다. 그 이유는 짧은 글 안에서 촌철살인의 문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드러내야 했으며 또 박동감 넘치는 서예 솜씨를 펼쳐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시기가 끝나고 교통과 통신 수단이 크게 발달하면서 이러한 간찰에 대해서 거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몇몇 대학박물관 등이 중심이 되어 간찰자료집들을 발간하게 되면서 점차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번역본도 활발하게 출간되었다. 한문학자인 임재완은 세 분 선생님의 편지글「삼현수독」, 조선시대 문인들의 초서편지, 정조대왕의 편지글 등을 연이어 번역 출간하고 유홍준과 김경숙 등으로 이루어진 한국고간찰연구회에서도 『조선시대 간찰첩 모음 1, 2』를 출간했다. 또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간찰이 연구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전경목은 『고문서를 통해서 본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에서 간찰 등을 활용하여 조선후기 생활상을 규명하였고 하영휘는 「한 유학자의 서간을 통한 19세기 호서 사회사 연구」라는 논문에서 조병덕이라는 한 유학자가 쓴 간찰을 통하여 조선말기 사회상을 자세하게 밝혀내었다.
이와 같이 간찰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 고려대학교의 심경호 교수는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크게 3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엮으며」가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자신이 간찰들을 번역하게 된 동기 등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선현들이 남긴 여러 편의 간찰 중 친우에게 부친 간찰 27편을 선정하여 우리말로 번역하고 자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선정된 간찰의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이규보와 이제현 및 정몽주 등 3명이며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김시습을 비롯하여 이황, 이이, 장현광, 허균, 최명길, 송준길, 윤휴, 박세당, 정제두, 이익, 이광사, 채제공, 홍대용, 이덕무, 박지원, 홍양호, 신대우, 정약용, 이옥, 이학규, 김정희, 이건창, 황현 등 24명이다. 이들은 모두 문학과 정치 및 예술 분야 등에서 두각을 드러낸 학자로 우리 지성사의 한 축을 담당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남긴 여러 편의 간찰 가운데 친우에게 부친 간찰만을 골랐다. 친우라지만 같은 동년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이와 사상의 차이를 떠나 서로 마음을 터놓고 격쟁을 하는 망년우(忘年友)들도 있었다. 친우끼리 주고받은 간찰들을 통하여 이들이 겪어야만 했던 학문적 고독과 정치적 불안, 국난 극복의 투지와 예술에 대한 열정 및 현실에 대한 소회와 절망 등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맨 끝에 있는 「덧붙이는 글」은 간찰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간찰의 개념과 형식 및 기능에 대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27명의 선현 간찰들을 선정하여 번역하고 이전에 밝혀져 있지 않은 수신자와 발신자 및 작성 연대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고증하고 또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가 이와 같이 간찰을 번역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고증학적 취향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간찰을 선정하여 번역한 첫 번째 이유는 친우간의 우정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지금 우리의 현실은 진정한 교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질의 쾌락을 숭상하고 권력 추구를 인간 본성이라고 합리화하며 체면치레의 만남과 이익 추구의 만남을 우정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고 비판하고 있다. 이어 “벗은 가까이 있다. 마음과 덕으로 사귀는 방법을 잊었을 따름이다. 왜 우리는 벗과 사귀는 공부를 하지 않는가?”라고 오늘날의 세태에 대해서 일갈한다. 그리고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인간관계에 건강한 모습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교도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시켜 왔던 옛사람의 경험을 상기하고 참된 교도를 각자의 주변에서부터 확산시켜 나가야 하리라고 본다.”고 확신하고 “옛사람이 벗에게 적은 간찰을 읽으면서 그 속에 담긴 절절한 우정을 재발견해보는 것도 그 한 방법이 될 듯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간찰을 선정하여 번역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학술적인 측면에 있었다. 일찍이 퇴계 이황은 주희의 『주자대전』 가운데서 문인 및 지인들과 주고받은 간찰을 뽑아 『주자서절요』를 엮어서 주희와 사우 관계에 있던 인물들의 인품과 학문, 주희의 사상을 이해하는 참고서로 삼은 일이 있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이황이 『주자대전』 가운데에서 명간찰을 뽑아 『주자서절요』를 만들었듯이 선현들의 간찰 중에서 명간찰을 뽑아 이를 일종의 『선현간찰절요』를 만들어서 학문적 전통을 잇고 싶어 했던 것이다.
서평이랍시고 되지도 않는 서툰 소리를 늘어놓는 것보다 심교수가 미려한 문체로 번역한 몇 편의 간찰을 통해 직접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과 우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친구를 만나면 우선 술이 어이 빠질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인생의 어려운 굽이굽이를 다 돌아 황혼이 지는 노년에 있어서랴… 어느 봄 날 이규보는 전탄부에게 다음과 같은 간찰을 보낸다.“인생은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하기에 오늘은 모였지만 내을은 또 각각 어디로 가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동안 한껏 재미나는 일을 다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요사이 집에서 술을 빚었는데, 아주 향기롭고 텁텁하여 마실 만합니다. 그대들과 마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살구꽃이 반쯤 피었고 봄기운이 확 풀려 사람들을 도취시키고 다감하게 만듭니다. 이런 좋은 계절에 술 마시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바라건대 이군이나 박환고(朴還古)와 함께 오시어 마시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 술이 며칠 되지 않아 바닥 날 것이니, 늦게 오시면 물만 마시는 곤욕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김시습하면 우선 선비의 절개와 지조가 떠오른다. 양양부사였던 유자한은 시골에 은거한 김시습의 재능을 아껴서 벼슬살이를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랬더니 김시습이 다음과 같은 간찰을 보내어 이에 대해 매섭게 거절하고 말았다.
“저는 외곬이라서 아무리 궁해도 구걸을 못합니다. 남이 주는 것도 받지 않고, 받더라도 어깨를 움츠리고 무릎으로 설설 기지를 않습니다. (…) 제 자신 이것이 나쁜 습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습관이 본성으로 굳어져서 바꿀 수가 없습니다. (…) 제가 이 바닷가 마을에서 노닌 지도 벌써 삼 년이 되었습니다만, 관원의 초청을 기대한 적도 없고 또 내 편에서 나아가 뵙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다 제 천성이 곧고 도도하여 그런 것입니다.”
친우들과의 대화 중에는 국가와 백성에 대해 걱정도 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정치가 바로 되지 않고 정계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성혼(成渾)과 같은 뜻있는 선비들은 하나 둘 벼슬을 그만 두고 시골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그렇게 하지 않자 여기저기서 비난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이를 눈치 챈 이이가 송익필에게 편지를 보내어 답답한 심정을 피토하듯 토로하고 있다.
“서한에서 말씀하시길, 유학자의 사업은 정녕 이래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찌 감히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겠습니까? 다만 사업의 도리는 천차만별이라고 하겠습니다. (…) 갑자기 삼대의 정치를 거론하여 건의해서 받아들여 시행되지 않으면 곧 떠나버리는 것으로 말하면, 그것은 오늘의 시국에 적절한 의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호원(성혼)이 오로지 물러나기만 구하는 것은 너무 집착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지금은 억만 백성이 물새는 배에 타고 있으므로 그것을 구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치를 하다보면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어떤 것을 선택할까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광해와 인조대에 조정에 있었던 관리라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명나라와 중원의 새 주인으로 떠오르는 청나라 중 어느 나라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조정에서 중책을 맡고 있던 최명길은 장유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최명길의 이 충고는 미국과 FTA 체결을 앞두고 있는 오늘 날에도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금번에 남한산성의 포위에서 나올 때 거의 죽을 뻔 하였다가 가까스로 살아나 임금과 나라를 보전하고 함께 옛 수도(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실로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 척화의 청론(淸論)은 위로는 명나라 조정을 위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선비들의 여론을 부지하는 것으로서, 바로 천하의 상경(常經)이요 고금의 통의(通義)입니다. 그 정론으로 삼는 바는 비록 삼척동자라 하여도 다 아는 바이거늘, 어찌 모르겠습니까? (…) 다만 우리는 이 조선의 신하이므로, 나의 군부(君父)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 조정만 위하는 것은 월진(越津; 정도를 지나침)의 혐의가 없지 아니합니다. 명나라 황제가 재조(再造; 중흥)시켜 준 은덕은 우리나라 군신 가운데 어느 누가 감격하여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우리나라가 생사의 위기를 당해서 어찌 옛날에 중흥시켜 준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가야 합니까? 조선을 위하는 신하라면 명나라를 위해 내 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리로서 당당하며, 또 실로 성현의 교훈에도 부합합니다.”
조선 후기에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간찰도 있다. 채제공이 이천부사로 재임할 때 자신을 추천해 준 중앙의 관리에게 보낸 간찰에 이러한 모습이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 있다.
“산골의 농사는 이달의 동북풍으로 망가지고 결딴나서 바야흐로 가을이거늘 사람 사는 마을에 밥 짓는 연기가 일어나지 않으니, 고당하게 버려져 있는 촌백성들은 그래도 살려낼 방도가 혹 목민하는 자에게 있으리라고 여겨서, 와서 호소하는 자들이 무리를 이루었거늘, 전혀 그들을 불구덩이에서 끄집어내고 물에서 건져낼 방도가 없습니다. 금년 봄에 흉작의 봄 기근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서 서로 베고 넘어져 있는 형편이었는데, 가을 들어 처음으로 군안(軍案)을 열람하여 정리하려고 보니 도망하거나 물고된 자들이 반이 넘으므로, 나무를 깎아 사람 형상을 만들지 않고서야 도저히 인원을 메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 여러 가지 사항은 모두 이 사람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희게 만듭니다.”
이이와 최명길 및 채제공의 간찰을 읽으니 조선 후기의 여러 모습들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도피일지는 몰라도 그래도 우리의 속을 탁 풀어줄 김정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로 유배되었던 김정희는 1847년 어느 봄 날 초의선사에게 다음과 같은 간찰을 보낸다.
“근래에 편지를 보내주셨는데도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은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그대가 서신을 보내는 것도 마음이요, 내가 답장을 하지 않은 것도 역시 마음이니, 마음에 어찌 둘이 있겠습니까.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의 뜻이 이에서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위에 예시한 글들은 27편의 간찰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27편을 모두 읽고 나면 이 한 권의 책을 통하여 조선후기의 사회와 문화를 모두 통독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단언컨대 이 책은 한권의 문화사요 사회사며 정치사이요 예술사이다.
이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는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하는 책이다. 우선 선현들의 어려운 간찰을 미려한 문체로 번역한 점이 돋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더 돋보이는 점은 한 장의 간찰을 통해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아주 생생하게 복원해 낼 수 있는 것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다. 동양의 문사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저자는 공간적으로는 동서양,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현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들려주는 해설하고 있는데 독자의 입이 그만 딱 벌어질 정도이다. 『논어』, 『맹자』, 『시경』, 『장자』, 『예기』, 『춘추좌전』, 『사기』, 『산해경』, 『자치통감』 등과 같은 동양의 고전과 선현들이 남긴 『성호집』, 『청장관전서』, 『완당전집』, 『목민심서』, 『매천야록』 등 각종 문집을 인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이야기하고 원작자 애니 프루의 『엽서』와 프랑스 중세의 철학자 아벨라르의 서간집 『사랑과 수도의 편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일러스트레이터 닉 벤톡의 『그리핀과 사비네』와 『낯선 사랑을 찾아서』 등에 대해서도 설명을 한다. 책을 읽는 동안 필자는 그의 종횡무진한 해설을 듣느라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였으며 흐름이 끊어질까봐 울리는 핸드폰조차 받지 못했다. 독자로서 부탁 하나 할 것이 있다. 너무 내 욕심만 차린다고 해도 좋다.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가족간의 사랑, 사제간의 교유 등에 대한 간찰도 연속해서 간행해주시길 바란다. 독자로서 순수한 바람이다.
저자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심경호 교수는 1955년에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문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후 일본 교토 대학으로 유학하여 중국어학중국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와 강원대학교를 거쳐 현재에는 고려대학교 한문학과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한문산문의 미학』, 『김시습 평전』 등이 있으며 역서로 『주역철학사』, 『불교와 유교』, 『한자, 백 가지 이야기』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강화학파의 가학 비판」, 「송강 정철의 삶과 한시」, 「서포 김만중의 산문세계」 등이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심교수는 한자문화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최근에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가 제정한 제1회 리쓰메이칸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상 개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는데 시라카와 시즈카는 심교수가 번역한 『한자, 백 가지 이야기』의 저자이다.
전경목 | 전북대학교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수료했다. 전북대 박물관 학예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고문서를 통해서 본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200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