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8 |
106회 백제기행 | 참된 전통의 계승 남평문씨 세거지
관리자(2006-08-08 11:54:35)
맘 놓고 있는 것 자체로 좋아라
글│ 최준영 전주전일중학교 교사
분주했던 한 주를 보내고 홀가분하게 오른 버스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만나 바빴던 마음 툭툭 털어 내고 여행길을 나섰다. 이번 기행지는 실제로는 그리 멀지 않은데 마음먹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경상도이다. 일요일이라 비교적 한산한 시내를 빠져 나온 버스가 오늘의 바쁜 일정을 위해 부지런히 달리기 시작했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하는 월드컵 열기만큼 날이 뜨거운데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차창 밖은 초록으로 빛난다.
버스 속에서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일행들끼리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내가 누구라고 소개하는 일이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러질 못하다. 매번 후닥닥 매 맞듯이 겨우 이름 석 자 밝히고 돌아와 앉는데도 큰일이나 해낸 듯 개운하다. 그간의 사정들을 정겹게 풀어내는 일행들의 인사를 들으며 웃고 또 웃다가 오늘의 첫 목적지 달성의 남평문씨본리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에 도착했다.
고려 시대까지는 인흥사(仁興寺)라는 큰절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절터 자리에 석탑 일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조그만 밭들이 둘러싸고 그 너머로 잘 정돈된 기와집이 늘어서 있다.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다 추위로부터 백성을 구제한 문익점(文益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주차장 가까운 어느 집은 새로 지붕을 올리느라 인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대개의 반가촌(班家村)이 궁색한 쇠락의 기운이 완연한 반면, 이곳은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느껴진다. 마당엔 고운 잔디가 깔려 있고 한 쪽 구석엔 텃밭 대신 화단과 파라솔이 놓여 있어 별장 같다.
식민지시대에 교육을 통해 외세에 대항할 인재를 기르고자 만들어진 수봉정사(壽峯精舍)에 들렀다. 그리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나무를 잘 다듬어 만든 둥근 기둥이 줄을 잇고 있어 남평문문의 가세가 어떠했는지를 가늠케 한다. 누마루에 앉아 우리 소리 한 자락을 청해 들으며 낭랑하게 퍼지는 소리에 취한다. 인수문고(仁壽文庫), 중곡서고(中谷書庫)에는 수많은 장서들의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고샅길 주변 담장의 키가 제법 높다. 큼직한 돌을 점점이 심어 모양을 낸 황토 담을 따라 광거당(廣居堂)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황토 헛담이 앞을 가로막았다. 폐기와를 켜켜이 쌓고, 한복판에는 심심하지 않게 다섯 갈래의 둥근 나뭇잎 모양을 꾸며 놓았다. 헛담을 살짝 비끼면 비로소 오른편으로 'ㄱ'자로 지어진 당의 면모가 드러난다. ‘廣居(광거)’는 ‘맹자(孟子)'의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에서 따왔다고 한다.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며, 세상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큰 도를 행한다.’ 사나이 대장부가 큰 뜻을 세우고 부귀빈천에 연연하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걷는다는 취지의 당호(堂號)이다. 그 규모도 규모지만 울울창창한 대숲의 푸르름이 마음을 툭 터 준다.
먼 길을 달려와 허기진 우리들은 이 지역에서 이름난 할매 곰탕을 쓱싹 해치우고 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향했다. 포장은 되어 있어도 길이 좁아 마주 오는 차와 길 다툼을 한다.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다람재' 위에 섰다. 사람들 발길 따라 기우뚱거리는 미덥지 않은 누정(樓亭)에서 바라보니, 아래로 유유한 낙동강이 흐르고 그 옆으로 단정한 서원의 자태가 드러난다. 함양 살던 ‘일두 정여창(一斗 鄭汝昌)'이 배를 타고 건너 와서 ‘김굉필'과 교유할 만큼 예전에는 뱃길이 더 편했다고 한다.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전해왔다'는 자부심 넘치는 이름처럼 소수(紹修)·도산(陶山)·병산(屛山)·옥산서원(玉山書院)과 더불어 5대 서원의 하나이다.
서원 초입에는 수령 400년 된 은행나무가 그야말로 버티고 서있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을 배향하며 심은 것으로 ‘김굉필나무'라 부른다. 혼자 서 있을 수조차 없어 몇 개의 굵직한 콘크리트에 의지해 겨우 서있다. 그런데도 육중한 몸뚱이에서 뻗어나간 무수한 가지마다 여린 은행잎이 철 따라 파랗게 돋아있다.
지금은 수월루(水月樓)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원래 밖에서 보면 서원은 층층으로 겹쳐 보인다. 엉성한 돌계단을 하나씩 밟아 오른 네 번째 돌단 위에 이층짜리 수월루가 있다. 팔작지붕을 얹고 선 수월루는 서원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과연 다른 건물들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해서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비해 정돈되지 않은 인상을 준다. 이 지역은 평야가 적고 산지가 발달하여 자연스럽게 경사를 활용하여 집을 짓는데, 도동서원 또한 층층이 쌓은 18개의 돌단에 건물을 앉히거나 뜰을 가꾸었다. 지형을 따라 지었기에, 생경하지 않고 주변과 잘 어울린다.
다시 삐틀빼틀 급경사를 이루는 돌계단을 올라갔다. 가파른 돌계단 양옆에는 넓고 판판한 소맷돌이 놓여 있다. 맞춤한 돌을 그냥 가져다 쓴 듯 가감된 인공(人工)의 기미가 없다. 엄격함 속에 모든 것을 쓸어 담아 틀 지우지 않는 자연스러운 여유가 있다. 환주문(喚主門)은 예전처럼 갓을 쓰고 통과했다면 머리만이 아니라 몸까지 낮춰야 할 형국이다. 사모지붕 위에 절병통을 이고 있는 모습도 익살스럽다. 건너 편 너른 마당 끝에 꽤 높은 기단 위에 당당하게 치솟은 5칸짜리 중정당(中正堂)이 있다.
중정당의 마루 한 가운데에서 허리 꼿꼿이 펴고 전방을 바라보면 시야가 확 트이며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과 마주하게 된다. 돌담조차 누마루 끝선 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것도, 환주문이 유난히 작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좌우를 둘러보면 공부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은 모두 숨어버리고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안배되어 있다. 또한 김굉필나무부터 사당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좌우의 대칭을 이룬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넉넉한 조선의 선비를 닮았다.
우리 일행은 대청마루에 앉아 기행의 노독을 달래며 쉬었다. 어린 친구들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을 보고 아예 드러누웠다. 밖은 뜨거운 여름햇살이 내리쬐는데, 강당 마루 위로는 바람이 솔솔 지나간다. 뒤로 이어진 가파른 돌계단 위로 사당이 보이고 역시 허술한 소맷돌이 놓여 있다. 돌계단 맨 아래 칸에 새겨진 삼태극(三太極)과 스와스티카(卍)는 세상 밖으로 선한 기운이 멀리 펴져 나가라는 바램의 추상이라고 한다. 아기자기한 여러 소품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자니, 이렇게 맘 놓고 있는 것 자체로 좋다.
도동서원을 나와 우리는 우포늪으로 향했다. 처음엔 감자를 캐는가 싶었는데 넓은 밭 곳곳에서 하얀 수건을 둘러 쓴 아주머니들이 붉은 망에 부지런히 양파를 담고 있다. 현풍, 도동, 창녕 모두 양파 밭이다. 먼발치에 이태리포플러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다.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은 ‘짝짝' 손뼉 치며 우리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 시원스레 위로 치솟아 바람에 한들거리는 포플러의 모습이 이제는 기억 속에만 있는 그리운 옛날 풍경 같다. 포플러는 시인이고 소나무는 철학자라더니 꼭 그 짝이다.
황톳길 주변에는 개망초 하얀 꽃이 지천으로 깔렸고, 나의 무식으로 '들꽃'이라 통칭되는 수많은 풀꽃들이 널렸다. 물가에는 한 뭉텅이의 자운영이 뒤늦게 피어 붉은 빛을 뽐내고 있다. 흔히 고인 물은 썩고 병들어 생명이 자랄 수 없다고 하는데, 우포늪에서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 우포는 고인 물이 아니었다. 그냥 조그만 저수지이겠거니 상상했는데 제법 규모가 크다. 인간의 간섭이 없었던 예전에는 이보다 두 배는 더 컸다고 하니 옛날 같다면 우리를 압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며 전망대까지 한 바퀴 돌았다. 해가 길어지자 포플러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하늘 위로는 하얀 왜가리가 날았다. 참새 한 마리 제대로 맞닥뜨리기도 쉽지 않은 일상을 빠져 나와 두 날개 활짝 편 하얀 새의 비상을 감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포늪을 보전해야 되는 이유는 우리 일상의 각박함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건만 버스가 고장이다. 집에 돌아갈 걱정도 잊은 채 자리를 잡고 앉아 ‘이미자'부터 ‘쑥대머리'까지 흥겹게 놀았다. 막걸리 한 잔에 갓 캐낸 달콤한 햇양파를 막된장에 찍어 먹고, '후루룩' 차가운 국물이 일품인 국수까지 얻어먹고서, 수리를 마친 버스에 올라 늦은 귀갓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