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8 |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관리자(2006-08-08 11:46:10)
글 | 장미옥 전주교대 부설초등학교 교사
나의 새내기 교사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그 당시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혹시 나처럼 이런 경험으로 부끄러워하며 미안해하고 계실 선생님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드리고자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해 본다.
교사라는 직업은 어릴 때부터 나의 꿈이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던 교사로서 내딛은 첫발은 서투름과 열정(?) 사이에서 무던히도 시행착오를 하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지금은 모두 어른이 되어 가정과 사회에서 각자 맡은 일을 충실히 하고 있을 그 아이들과 보낸 시간들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교실에서는 뛰고 달리고 싸움하는 난장판이 계속 되었고 매달 실시하던 월말고사 성적은 내 손에서 회초리를 떠나지 않게 했다. 교실의 질서를 잡아 조용한 가운데 공부 열심히 하게 하는 길은 체벌밖에 없다고 판단한 나의 짧고 위험한 생각이 아이들은 사랑의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그 때는 체벌에 대해서 지금보다 민감한 사회 상황은 아니었지만 내가 존경하는 은사님으로부터 어린이들을 체벌보다는 칭찬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을 귀 아프게 들어왔고 또 그렇게 하리라 마음에 새기면서 시작한 교사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다짐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이렇게 겁 없는 판단을 내린 것은 한 달에 한 번 실시하는 월말고사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좋은 성적을 얻게 하여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우수한 교사(?)라는 평가를 받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이렇게 행해지는 월말고사는 가장 평균이 높은 학급, 부진한 아이들이 많은 학급, 가장 상을 많이 받는 학급 등등으로 결과가 처리되어 교장선생님의 결재를 받았다. 하필이면 내가 맡은 업무가 평가업무였으니 월말마다 통계 처리한 것을 가지고 교감 선생님을 거쳐 교장실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였다.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우리 반 아이들의 성적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것, 또 4년제 대학을 나왔는데도 왜 이렇게 성적을 못 올리냐는 등의 질타(?)를 받을 때는 정말 너무나 괴로웠고 내가 꿈꾸던 교사의 길이 아니었기에 갈등도 많이 했다. 사실 그 당시 어느 교원단체를 후원한다는 이유로 교장선생님한테 미움을 받고 있기도 했다.
경험이 많으신 선배 교사들에 비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또 하나의 변명을 더하자면 6학급의 소규모 학교에서 내가 맡은 업무의 양은 많고, 잘 처리할 수도 없는 공문들을 시간을 다투어 교육청에 보고하다 보니 공부시간에도 아이들에게 신경을 못 쓰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 교사에게 맡겨진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지도가 잘 되고 학습의 효과도 높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선행학습도 할 수 없는 그 시골 아이들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무서운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문제집을 선택해서 풀게 하고 내가 다시 설명하면서 풀어주고 그것을 지우개로 모두 지운 다음에 다시 풀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 한 시간의 수업을 내용만 주입식으로 정리해서 알려 준 다음 문제만 풀게 했으니 정말 한심하고 한심한 일이었다.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다시 설명해 준 것을 틀리면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다. 한 개 틀리면 한 대씩 때린다고 경고를 한 다음 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퇴근 후에 자취방으로 우리 반 아이들을 불러 목소리 높여 문제집을 풀게 하였다. 선생님 집에 간다는 것, 얼마나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일까?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공포의 선생님 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시험공부를 시키는 동안 우리 반 평균이 꼴등은 면하고 있었고 ‘그래 역시 아이들은 엄하게 사랑의 매로 가르쳐야 공부를 잘 하는 거야. 그러니까 옛말에 예쁜 자식 매 한대 더 때리라고 했겠지.’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가을날 나는 내가 저지른 커다란 죄악의 흔적을 보게 되었다. 한 아이가 삶은 고구마를 하나 가져와서 부끄럽게 내미는 손바닥에 내 죄악의 흔적이 퍼렇게 비쳐지고 있었다. 정말 목청껏 설명하고 가르쳐 주어도 잘 못하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많은 매를 나한테 맞았을 것이고 그렇게 퍼런 멍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지도 않고 보지도 않아서 내가 때린 흔적이 그렇게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고구마를 받아 든 내 손과 마음은 떨렸고 온 몸의 힘이 쑥 빠지면서 ‘내가 이제껏 미친 짓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고구마를 보면서, 나는 눈물이 나왔다. 회초리로 내 손을 한 번 때려 보았다. 너무나 아팠다. 월말고사 성적을 높여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지 않으려는 그 알량한 자존심이 이유가 되어 매를 든 내가 제 정신이 아닌 선생님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왔다. 그래도 자기 선생님이라고 고구마를 가져다주는 그 마음에 다시 한번 가슴이 찡해져 왔다. 자취방에 돌아와 펑펑 울면서 내 자신의 부족함과 치졸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매를 든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 후 나는 매가 없어도 학급을 꾸려 나갈 수 있는 방법, 매가 없어도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을 공부하게 되었고 나를 다스리는 방법도 배워나갔다. 어떤 문제 상황에서 매를 들면 물론 빨리 해결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된 것이 아니라 서로 믿음이 깨지고 감정만 나빠진 상태로 해결된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로 하여금 확실히 매를 버리게 한 것은 우리 큰 딸이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빨리 결혼한 나는 그 다음 해 딸을 낳게 되었다. 내 자식을 키우면서 우리 반 아이들도 내 자식처럼 느껴졌다. 내 자식이 이렇게 매를 맞으면 내 자식은 물론 부모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는 매를 들 수가 없었다. 특히, 시아버님께서 ‘맞고 자란 아이들이 커서 자기 자식을 때리면서 키우게 된다.’고 강조하시면서 매를 들어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엄격하게 나무라시고 반대하셨다. 내 과거의 잘못과 시아버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그 후로 내 교직관은 ‘우리 반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이 되었고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학급 경영을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내 경험 이야기들을 교육대학교 학생들이 교육실습을 나왔을 때 꼭 들려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말라는 당부와 더불어…….
새내기 시절 내가 아프게 했고, 나를 아프게 했던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괴롭고 미안하다. 교사는 평생 노력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겨 본다. 콩이 익을 때까지 콩을 감싸주는 콩깍지처럼 우리 반 아이들을 감싸주고 보듬어 주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고 그 때의 그 부끄러운 경험이 오늘도 나를 게으르지 않게 한다. 그 시절 부족한 선생님 만나 아프고, 고생했던 그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얘들아, 정말 미안하다…….
장미옥 | 전주 교육대학교 부철초등학교에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