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8 |
무제
관리자(2006-08-08 10:55:31)
1.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과 호랑이가 멸종 위기에 처한 요즘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그런 어중간한 옛날의 일입니다. 서쪽 나라에 한 시인이 있었답니다. 길거리의 아이들도 이 시인의 시를 읊조리더라는 말이 나돌 만큼 명성이 자자했답니다. 어느 날 시인의 친구가 불쑥 찾아 왔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글솜씨도 시인 못지않다고 스스로 믿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시인이 집에 틀어박혀 나다니지 않은지 오래여서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 염탐을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차를 세 번째 우려낼 즈음 친구가 물었습니다. 요즘 시가 뜸하구먼. 시내가 말랐네. 저잣거리와 자네 시가 무슨 상관이람? 시의 냇물이 바닥을 보였다는 말일세. 이른바 천재의 운명이지. 오늘은 억지로 한 편 깨작거려 보았네. 한 번 볼까? 시를 받아든 친구는 고작 몇 줄 읽기도 전에 온몸의 신경세포가 올올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게 어디 사람의 솜씨란 말인가? 그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습니다. 형편없지? 시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친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 아직 다 못 읽었네. 요즘은 이런 것만 쓰고 있다네. 전부 몇 편이나 되나? 세어 보진 않았네.
시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친구는 시인의 책상 아래를 훔쳐보았습니다. 거기 족히 삼백 장은 됨직한 화선지가 먹물을 품고 쌓여있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친구의 입에서 욕이 터집니다. 이런 나쁜 놈! 쌓여있던 것들이 모두 한 편의 시를 고쳐 쓰고 또 고쳐 쓴 흔적이었더라는 얘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과장입니까 아니면 허구입니까?
2.
기초예술이라는 단어가 낯설어서 다시 쳐다보다가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려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기초예술을 순수예술과 등가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순수는 두 방향으로 짝을 이룹니다. 그 하나는 참여인데, 참여와 순수를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순수가 비순수의 탈을 쓰고 있었던 과거의 행적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참여를 어용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바로 변신한 순수의 최근 전략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짝은 응용입니다. 이것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구분을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초과학의 산물인 이론과 기초예술의 작품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성격의 차이가 있습니다. 기초과학의 연구가 존립 자체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반면 예술작품은 언제나 소비자 또는 향유자를 의식합니다. 후원자도 역시 그렇게 접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업예술과 기초예술을 대비시키는 것도 궁극적 해결에 미치지 못합니다.
대중예술을 고급예술 또는 본격예술과 대비시키고, 기초예술을 후자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하려는 시도 역시 기초예술이 예술의 창조, 매개, 향유의 모든 측면에서 일정한 역할을 자임하기 때문에 부적절합니다. 기초예술은 대중성 확보를 소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예술이라는 용어가 작금의 시장친화적인 상업예술 또는 대중예술의 상대적 개념으로 설정된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바꾸어 기초예술이 시장에 대하여 애증을 함께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장을 통하여 삶의 질을 고양시키려 해도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술인들이 기초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면에는 문화와 예술을 병치하여 문화예술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서 이를 산업의 일종으로 취급하려는 추세에 대한 저항이 숨어 있습니다. 문화관광이라는 용어 역시 비슷한 혐의를 쉽게 벗지 못합니다. 저는 기초예술이라는 말의 조성에 산업화에 대한 저항과 시장에 대한 애증뿐만 아니라 토대를 확산시킨다는 의미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유사한 현장 중시의 태도가 관여했다고 생각합니다.
| 정철성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