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7 |
치욕의 지구에 꽃 피고 새 날다
관리자(2006-07-07 14:28:31)
自然
김용택 시집 『그래서 당신』을 열면 산이 물들고 들이 펼쳐지고 강물이 흐른다. 그 속에 꽃이 흐드러지고 새와 나비가 난다. 부는 것은 바람이요, 물드는 것은 단풍이다. 봄비가 내리는 그 곳마다 사람과 사람의 집, 그리고 화자가 있어 당신에게 말을 건다. 화자를 둘러싼 이 아름답고 사랑 넘치는 공간을 꿰며 시간은 밤낮으로 흘러 사계를 이루고, 꿈에서 생시로 흘러서는 다시 영원으로 흐른다. 이 아름다운 배경에서 화자는 시를 쓴다. 아니, 사랑을 쓴다.
꿈에서도 생시처럼 흰 종이 위에 / 시를 썼다 //
이게 꿈이지, 이게 꿈이지 그러면서 꿈속을 나와도 / 시구절이 생시로 이어졌다 //
꽃을 따라 꿈에서 생시로 날아온 / 나비, //
온 生이 다 환하구나 // 나비 / 날다 - 「나비」 전문 -
1연에서 화자가 꿈에서 쓴 ‘시’의 내용을 간추리면 ‘당신을 사랑한다’이고, 2연은 ‘사랑을 만나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의미이다. 1, 2연의 비유이면서 4연과 5연의 바탕을 이루는 3연은 시인의 의도를 흠뻑 함축하고 있어 보인다. 나 / 당신의 관념으로서의 나비 / 꽃이라는 자연물, 시를 쓰는 화자와 이 작품의 주인인 시인, 꿈에서 생시로 이동해 생동하는 꽃과 나비의 어울림 등은 生에 대한 화자의 판단과 행위의 조건이 되는 것들이다.
시가 자연에, 자연이 사랑의 대상에 연결되면서 한 몸을 짓는다. 이 지점에서 김용택시는 말하는 것 같다. 자연과 사람과 시가 하나 될 때 진정 맑은 세계를 이룬다고, 그때 우리의 몸짓은 춤이 되어 날아오른다고. 이런 의미에 대한 천착은 이 시집 『그래서 당신』의 핵심을 캐는 일일 것이지만, 핵심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중요한 또 다른 것은 시인의 표현(고백) 방식에 있다.
無心
나는 그대가 좋답니다 // 은영아! 하고 산에 대고 부르고 싶지요 // 은영아! 하고 바람결에다가 부르고 싶지요 // 나는 혼자 바람 부는 산을 보며 진짜 그렇게 부를 때가 있답니다 -「내 여자」 전문 -
고백의 내용이 얼마나 소박한가? 고백의 수법은 또 얼마나 단순한가? ‘그대가 좋다’, 그리고(그래서) ‘네 이름을 산에 대고, 또 바람결에다가 부르고 싶다’가 고백 내용의 전부이다.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 이유도 설명도 과장도 없다. 꾸밈도 없어 향기도 날 성부르지 않다. 현대 도시인의 세련된 고백이 아니라 깡촌 촌스러운 선머슴아이의 고백이다.
혼자서 “바람 부는 산을 보며” “은영아!”라고 부르는 어떤 사내아이(‘은영’이라는 이름의 주인이 실제 시인의 부인이라는 점에서 화자인 사내아이는 시 밖의 ‘아이다운’ 김용택 시인이다)는 얼마나 외로워 보이는가? 그러나, 저절로 터져 나오는 사랑의 감정은 넘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숭고하도록 아름답다. 자연 앞에서 저 사내아이는 하고 많은 일 중 왜 사랑 고백을 생각했을까? 이는 고백의 방식에서 보는 사내아이의 순수함과 시인의 전략에 닿아 있을 것이다.
“산에 대고 부르고” 싶고 “바람결에다가 부르고” 싶은 것에는 산이 증거해 줄 늘 푸른 사랑이 산처럼 커지길, 바람이 그 사랑 전해주길 바라는 주술적 기대가 잠재되어 있다. 이렇게 읽으면 화자는 영원불변한 산의 속성에 기대어 사랑의 영원불변함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위의 시에 대한 첫 반응을 바꾸어야 한다. 고백의 내용은 얼마나 지극하고, 그 수법은 또 얼마나 무서운가? 라고.
無爲
잎이 필 때 사랑했네 // 바람 불 때 사랑했네 // 물들 때 사랑했네 // 빈 가지, 언 손으로 // 사랑을 찾아 // 추운 허공을 헤맸네 // 내가 죽을 때까지 //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 「그래서 당신」 전문 -
“사랑을 찾”는 것이어서 “언 손으로” “추운 허공을 헤”매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하여 ‘봄/여름/가을/겨울 사랑했다’는 6연까지와 ‘죽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7, 8연으로 나뉘는 이 작품은 한해의 사랑을 들어 영원의 사랑을 다짐하는 시로 쉽게 읽힌다. 그런데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이 끝 연의 ‘그래서’이다.
‘그래서’를 ‘(당신이) 강가의 나무와 같아서’로 읽으면 “잎이 필 때”, “바람 불 때”, “물들 때”, “빈 가지(일때)”는 계절의 표지 외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때, 잎 피고 바람 불고 물 들고 비는 주체는 당신이 된다. 이 지점에서 시는 비연시(非戀詩)적인 것으로 제 몸을 바꾼다. 잎 피고 물들고 빈 가지가 되는 섭리를 사랑한다, 자연의 질서를 사랑한다, 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로서의 자연을 사랑하겠다, 이것이 이 시가 의도하는 전언의 본질일 것이다.
영원한 것/변하지 않는 것과 순수/꾸밈없는 태도는 『그래서 당신』을 이루는 시들의 형식과도 관련된다. 꾸밈을 모두 지워버렸으니, 본질만 남겼으니, 시행은 짧고 형식이 간명할 수밖에 없다. 비유하면 “월척”(이문재, 날갯글)만 남았으니 어망이 단촐할 수밖에 없는 격이다. 그러나 날갯글의 말처럼 “안으로는 여백이, 밖으로는 여유가 흘러넘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사랑은 무겁고 외로움이 깊기 때문이다.
다시, 自然
『그래서 당신』에서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랑을 찾아 시인은 어디어디를 헤매었고, 지금 그리워하는 사랑의 대상은 무엇일까? 살짝 「自序」를 엿보면 시인은 지금 ‘치욕의 지구, 타락한 세월의 쓸쓸한 들녘’에 서 있다. ‘치욕의 지구’가 된 것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 때문이다.
점 점 점 방점을 찍듯 화자가 뜨거운 목소리로 불러놓은 자연과 순수는 탐욕과 오만의 반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집의 시들은 시인이 ‘치욕의 지구’에 피워낸 꽃이고, 날려 올린 새이다. 바람으로서의 바람이다. 치욕의 지구에서 부르는 희망에의 소망이다. 근본을 회복하자는 절규이다.
현대인의 탐욕과 오만을 치유할 생약(生藥)으로서의 자연, 탐욕과 오만 등 인간의 개입이 제거된 무위/순수 상태로서의 자연, 온갖 치레도 거짓도 없어지고 참되고 순수하고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당신만 남아서 『그래서 당신』이 되었다.
오창렬 |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 국문학과와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9년 계간시지 『시안』에 「하섬에서」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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