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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7 |
동대(東臺), 잊혀진 친일파의 흔적
관리자(2006-07-06 17:41:32)
음을 알 수 있다. 오목대 동쪽편 박영근의 가옥 부근에는 4기의 비석과 석등 부재로 추정되는 기둥이 1점, 박영근의 묘가 있다. 한옥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정면 오른쪽 한칸 바닥면을 높여 전주시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사진 1, 사진 3) 인근 주민에 의하면 이곳에서 사람이 일상적으로 거주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며 별장과 같은 성격의 건물이었을 것이라 한다. 박영근은 이곳을 동대(東臺)라 부르고 있다. 4기의 비석은 박영근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새긴 비석이 1기(사진 1), 박영근의 아버지 박한상의 정려비 1기, 박사분과 박한상의 정려비 1기가 건물의 전면과 좌측면에 세워져 있고,  비석을 세운 연유를 밝힌 비 1기와 운문이 새겨진 것을 추정되는 석등 부재가 1기(사진 2)가 건물의 후면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을 지나 낙수정 쪽으로 한 10여미터를 가면 박영근의 묘와 묘비가 있다. 그런데 박영근의 묘비는 백비로 전면에 “관청음밀양박공영근지묘(觀淸音密陽朴公永根之墓)”라 새긴 것 이외에 아무 내용도 새겨 넣지 않았다.(사진 4) 뿐만아니라 정려비 등 모든 비석의 연대 부분이 모두 정으로 쪼아져 있다. 자서한 비에 ‘나이 70이 되어 세간의 나이를 잊고자’한다고 자서한 것과 연호는 쪼아졌지만 경진이라 쓰여진 내용으로 보아 박영근이 70이 되던 1940년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곧 무너질 듯 방치된 건물 역시 박영근이 칠순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해방 이후에도 한 동안 그 후손들이 이곳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버지 박한상의 정려비 등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건립연도가 나오는 간기부분을 모두 정으로 쪼아 놓은 것을 보면 일제시대에 세워진 것임은 분명하며 적어도 194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 세워진 상당수의 비석들은 일본왕(천황)의 연호를 새긴 부분을 전부 쪼아 읽어볼 수 없게 만들었다. 비석의 주인과 관련된 사람들이 그랬는지, 아니면 식민지 지배의 분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떻든지 훼손된 비들이 친일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예외도 없다. 고 황면주선생님이 남긴 한 장의 사진으로 밝혀야 할 친일의 역사가 다시 드러난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적당한 때가 되면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지사인지 모르지만. 잊혀진 기억이 문득 떠오르면 그 때의 기분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은 세월과 무관한 듯하다. 한참 지난 옛 일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하는 것은 시각적인 요소가 크다. 거리를 걷는다던지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과거 어느 시점에 놓인 나를 발견하고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옛 사람들의 소식을 궁금해 하기도 한다. 종종 사진첩을 보면서 드는 소회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을 보고 기분이 좋다면이야 지갑에라도 넣어 놓고 다니면서 볼 터이지만, 우울하거나 슬픈 기억의 사진은 되도록 보지 않으려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도 그 사진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이도 저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무덤덤한 옛 사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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