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7 |
'싸박싸박', '장감장감' 그리고 '서나서나'
관리자(2006-07-06 17:33:49)
한국어는 흔히 정서적 표현이 발달한 언어라고 한다. 색깔 형용사의 분화는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하다. 색깔 형용사는 색을 인지한 결과를 어휘로 표현한 결과이니까 말을 바꿔서 하자면 어휘의 분화가 얼마나 다양한가는 곧 색깔의 차이를 얼마나 섬세하게 인식할 수 있는가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동양인들이 인식한 기본 색은 다섯 가지다. 그래서 무지개를 표현할 때도 오색 무지개라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한국어에서도 색깔 형용사의 기본 어휘는 단순하다. 즉 ‘희다, 검다, 붉다’ 형과 ‘하얗다, 가맣다, 노랗다, 빨갛다, 파랗다’ 형이 그것인데 다섯 가지로 색을 구분한 것은 뒤에 있는 계열의 어휘들이다. 이 단어들은 먼저 모음을 바꾸는 방식으로 색깔의 짙고 옅음을 구분한다. 그래서 ‘허옇다, 거멓다, 누렇다, 뻘겋다, 퍼렇다’가 생기고 그 중에서 ‘가맣다’와 ‘거멓다’는 다시 자음의 예사소리와 된소리 교체로 또 그 짙고 옅음을 구분한다. 그래서 ‘가맣다’, ‘까맣다’, ‘거멓다’, ‘꺼멓다’의 구분이 가능하다. 거기다가 접두사를 붙이는 방식으로 또 색깔의 분화를 인식한다. ‘새까맣다, 시커멓다’가 그 예이다. 또 어휘에 따라 각각의 접미사를 붙여 그 정도를 구분한다. ‘가무잡잡, 거무튀튀, 거무스름, 거무칙칙’ 등이 그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접두사와 접미사가 동시에 붙어서 ‘시푸르딩딩’ 등의 표현도 가능하다. 그렇게 따져놓고 보면 한국인이 색깔의 차이를 구분하는 방식이 얼마나 섬세한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는, 방식은 다소 다르지만 그 섬세한 차이를 표현하는 재미난 방언 부사 어휘 몇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서나서나’와 ‘싸박싸박’이다. 전라북도의 말과 가장 인접해 있는 전라남도 방언사전에 ‘싸목싸목’이란 항목이 있는데 사전의 뜻풀이로 ‘천천히’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서나서나’ 혹은 ‘싸박싸박’도 거칠게 말하자면 ‘싸목싸목’이나 별반 다를 게 없이 ‘천천히’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서나서나’와 ‘싸박싸박’은 구체적인 행위에 있어서 그 쓰임새가 달라진다.
① 오늘은 눈이 참 이쁘게 온게 눈 구경도 험서 ( ) 걸어서 가자.
② 뭣이 고로코롬 바쁘다냐? 숨도 좀 돌리감서 조깨 ( ) 허먼 누가 잡어간댜?
①, ②의 빈칸에 어울리는 말은 각각 ‘싸박싸박’과 ‘서나서나’다. 물론 경우에 따라 “‘서나서나’ 걸어감서 이얘기나 좀 허자.”라거나 “서둘지 말고 싸박싸박 혀.”라고 표현해도 크게 흠이 될 일은 아니나, ‘싸박싸박’은 걷는 행위와 더 잘 어울리고 ‘서나서나’는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을 생각할 때 시간의 여유를 두고 서둘지 않고 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예문에서 ‘싸박싸박’이나 ‘서나서나’는 다소 어색하거나 쓰일 수 없다. 아래 문장에서 *표는 쓰일 수 없는 자리이고 #는 어색함을 나타낸다.
① 일등으로 뛰어 들어와 갖고 관중들한티 ‘*싸박싸박/*서나서나’ 손을 흔들드랑게.
② 아 얼매나 조심스럽겄어? 그렁게 저렇고 ‘#싸박싸박/#서나서나’ 밥을 먹지.
손을 천천히 흔드는 모양을 나타낼 때나 밥을 천천히 먹을 때 ‘싸박싸박’이나 ‘서나서나’로 그 모습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이 말은 이 두 어휘가 ‘천천히’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님을 나타내며 수식하는 동사가 가지는 행위에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나타낸다.
한편 “서둘지 말어. 조심히서 운전허고 ‘싸박싸박/서나서나’ 가.”의 문장에서는 ‘싸박싸박’과 ‘서나서나’가 다 쓰일 수 있다. 이것은 운전하고 가는 경우에 ‘가다’에 초점을 맞추어 ‘서둘지 않고 여유 있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싸박싸박’과 ‘서나서나’가 모두 사용될 수 있는 예이다. 이 환경에서 이 두 어휘의 의미는 ‘어떤 행위를 할 때 여유를 가지고 서둘지 않는 모양’을 나타낸다.
이 두 어휘에 담긴 정서는 여유다. 전라도는 드넓은 호남평야를 갖추고 있어서 농자천하지대본의 시대에는 그야말로 삶이 풍요로운 지역 중 하나였다. 물론 우리에게도 보릿고개가 있었고 굶주림을 벗어나는 게 삶의 목적인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판소리를 비롯하여 그림과 글씨 그리고 시인, 소설가가 즐비한 문화적 토양을 가진 사람들답게 늘 생활의 여유를 가지려 노력해 왔던 전라도 사람들의 그러한 정서를 반영한 어휘가 바로 ‘서나서나, 싸박싸박’ 등의 부사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서둘지 않는 모습, 그래서 눈 오는 날이면 ‘싸박싸박’ 걸을 줄 알고, 비오는 날에는 또 ‘장감장감’ 걸을 줄 알며, 무슨 일을 해도 ‘서나서나’ 할 줄 아는 여유는 우리 동네 사람들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장감장감’은 징검다리를 건너듯 걷는 ‘징검징검’보다 다소 작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나타내는 부사어다. 이 표현 또한 ‘징검징검’과 더불어 매우 실용적이고 예쁜 말이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아리작작한’ 걸음걸이 그것이 ‘장감장감’이다. 그래서 ‘싸박싸박’과 ‘장감장감’은 걷는 모습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두 어휘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의미의 차이 역시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장감장감’과 ‘서나서나’가 한 자리에서 함께 사용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장감장감’에는 걷는 행위의 동작성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서나서나’와 ‘싸박싸박’ 그리고 ‘장감장감’은 서둘지 않는 여유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여유를 바탕에 둔 공통점이 있으나 그 어휘가 사용되는 사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장감장감’과 ‘싸박싸박’은 걷는 행위의 동작성에서 비교 가능하며 ‘싸박싸박’과 ‘서나서나’는 행위의 범위에 있어서 비교가 가능하다.
아무리 여유가 좋다지만 아무튼 너무 느슨해져서 시도 때도 없이 ‘비 맞은 장닭맹키로 자올다고 자올자올 히서는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