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7 |
가족은 만들어지는가, <가족의 탄생>
관리자(2006-07-06 17:26:40)
프롤로그. 문학 동네 이야기
가난은 남루에 지나지 않으니 서로의 이마라도 짚으라는 말당의 시가 있었다. 그리고 길 끝에 돌아와 죽은 파락호 남편을 놓고 대성통곡하는 소설들을 지나 철없는 엄마가 등장한 지도 꽤 됐고. 월드컵 붉은 물결이 춤추는 이 마당에 베컴의 프리킥 같은 소설 한 편이 있으니, 『아내가 결혼했다』! 결혼제도의 통념인 '독점'을 깨는 이 귀여운 제목의 소설은 두 남자와 결혼한(아니, 결혼해버린) 아내의 이야기를 축구에 버무린 히트상품. 제법 의미 있는 사회적 이론을 버터삼아 중혼의 자율성 혹은 새로운 가족형태에 대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똑똑한 여자 만나 쿨하게 사는 체 하는 인간이 겪는 업보를 현란한 드리블로 보여준다. 연애보다는 축구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는데, 새롭다.
나만 그럴까. 갑자기, ‘나요’ 하면서 전화를 걸어오면 명치 안쪽을 무겁게 하는 사람이 식구 중에 한 사람은 있기 마련.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거기에 돈과 인간관계가 걸려 있을 터. '길에서 가족을 만나면 슬프다'고 썼던 김영승의 시 그리고 고재종과 유용주의 시도 아프긴 마찬가지. 가족이란 것이 벗어서 한 쪽에 놓아두고 싶은 누더기 같다는 이야기가 문학과 영화의 단골 주제다. 여기 누더기 가족이 만드는 따뜻한 뜨개질 같은 영화가 있다.
에피소드 1 + 2. 가족이라는 누더기에 묻어온 아이 둘
혼자 사는 분식집 아줌마 문소리에게 5년 만에 남동생이 찾아온다. 20년 연상의 고두심을 데려온 이 무대뽀는 사회적 의무 혹은 법적인 책임 같은 데 개념이 없는 날건달. 오래 못 본 반가움은 잠시고 이 말종들은 혐오와 실망과 소모만을 남겨주는데 누나는 밥과 잠자리를 전적으로 책임져 준다. 밤마다 방구석에서 고양이 앓는 소리를 내서 문소리를 잠 못 들게 하는 날이 며칠 지난 후, '또 하나의 가족'이라할 만한 어린 여자 아이가 나타난다. 천사가 동정녀에게 나타나 수태를 고지하는 양식도 아니고, 이 쬐꼬만 아이는 뭐냐, 고두심 전남편의 전처가 낳은 딸. 문소리는 이 뻔뻔한 누더기들에게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라고 한마디 할 뿐. 그녀는 시험에 들되 악에 빠지거나 적대하지도 않지만 결국 고두심은 아이를 데리고 떠난다. 장면 하나. 여자 아이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화면의 중심에서 개와 함께 폴짝폴짝 뛰노는 마당을 바라보는 빛이 살짝 걸쳐 앉는 마루 장면은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이다.
일본인 전문 가이드 공효진은 애인과 막 헤어진 상태. 연애만 하는 엄마는 시한부지만 딸은 엄마의 복지에 대한 책임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 이제 그녀는 대책 없는 엄마도 낭만적인 사랑이나 사회적 안정감 모두 다 버리고 일본에 가는 것이 작은 목표인데 엄마는 이복 남동생 꼬맹이를 남기고 암으로 죽는다. 경멸해 마지않던 엄마가 남기고 간 큰 가방이 준 눈물의 흔적들과 함께 공효진은 졸지에 보호자가 된다. 그녀는 일본을 포기하고 꼬맹이 소년이 스무 살 봉태규가 되도록 키우는데……
에피소드 3. 칭얼대는 남자, 헤픈 여자, 밥 먹이는 엄마들
별 개연성 없는 이 두 이야기는 더 이상의 소모를 생략하고 한참의 세월을 건너뛴 채 하나로 봉합이 되는데, 이제 이야기는 봉태규의 괴로움. 춘천 가는 기차에서 만난 남녀의 러브스토리. 정유미는 얼굴도 맘도 예쁘지만 모두에게 친절한 것이 흠. 봉태규 말로는 그게 헤픈 거고 병인 거라. 힘든 선배 뒤치닥꺼리 다 하는 그녀에게 이 쪼잔한 남자는, ‘나한테 집중해주면 안 되겠’냐고 칭얼댄다. 결국 헤어지자면서 티격거리다가, 둘은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거기 이 처녀의 집에 엄마가 둘이라. 그녀들이 바로 오지랖이 넓은 문소리요 고두심. 에피소드가 플롯을 갖춘 조밀한 이야기로 탄생하는 순간. 여기서 관객들은 감독의 웅숭깊은 시선에 낮은 탄성을 질러댄다. 이 기찬 타이밍에 대배우들이 에너지를 발산시키는데 그 대사는 싱겁기 그지없다. 헤어졌다는데도 두 어미는 ‘그래도 밥은 먹고 가’란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끼리 섞여 살지만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 그들은 그저 밥을 함께 먹을 뿐.
TV드라마는 허구헌날 숨겨놓은 혈육으로 암투를 벌이는 마당에 문소리 집 케이블 TV에서는 중년의 공효진이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 이어 화면은 공효진을 하늘 위로 띄우고, 하늘에서는 폭죽이 터진다. 가난하지만 비열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고 따뜻한 사건의 배치를 통해 그 감정선의 균열을 매끄럽게 손질하는 감독 김태용이 보여주는 매력적인 포인트.
긴 에필로그. 식구의 발견과 이매진
만나면 싸우기만 하는 가족 <초록물고기>나 누추함을 좌우연타로 늘어놓는 <주먹이 운다> 역시 구타를 유발하는, 버리고 싶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평화를 찾기까지 대책 없이 분노하고 후회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돌로레스 클레이븐>이나 <안토니아스 라인> 역시 드러나게 모성을 강조하기에 가슴에 돌이 얹힌다. 이런 불편함의 연장에서 본 <가족의 탄생>은 누구도 뉘우치지도 않는 데다 두 엄마가 고행에 이르는 성녀도 아니고 카리스마도 없기에 집밥 같이 간이 맞는다. 과도함이 없는 배우들의 연기에는 화학조미료가 없어 그들이 던지는 대사는 지글지글한 찌개 같고 온기가 넘친다. 하여 ‘모성 중심사회로써의 대안’, ‘가족의 미래’라고 평론가들의 칭찬이 자자한데, 정말 그런가.
군대 고참 말처럼, 단체생활 힘들다. 가족도 단체생활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사라지거나 일단 아버지의 권위를 피하면 모든 것이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두 아이의 애비인 나도 안다. 우리 살고 있는 사회가 은연중 부모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위에 열거한 영화들이 가족의 고통에 동참하고 반성하라며 감성을 자극한다는 것도. 그래서 태클이 전혀 없는 이 영화는 대안이라기보다는 판타지 쪽 아닐까. 왜? 출산율 정체, 홀로 가정이 느는 시대에 가족의 새로운 진화의 관점을 수용하는 따뜻한 위무이지만, 부성은 하나도 없고 착한 모성만 넘치는 그림이기에, 화면 속에서는 아무도 미워하거나 죽어가지 않기에. 그래도 인정할 것, 새로움. 우리가 견디는 사고방식보다 한 발 앞서간 감독의 생각 말이다. 그래서 새것을 발견한 한국영화에 기대어 내가 꿈꾸는 말년의 가족을 생각해본다.
웬만큼 모험이나 혈통계승과 양육을 끝내고 은퇴를 해도 한 이십년 넘는 삶이 기다린다. 역시 자신만의 공간이나 외롭지 않을 가족은 필요할 것. 어떤? 일방적으로 작용한 혈연 말고, 동창이나 동문이 아니어도 좋으리. 아픈 우리 스님, 우리 부부의 여행에 자주 참가한 독신녀, 일찍 낙향한 제자들과 친구들이 생각난다. ‘지금 여기’를 즐기지만 분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간섭하지 않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던 사람들. 회비나 규약 없는 모임이 좋듯, 물론 모임의 이름은 필요 없겠지, 우리는 결사가 아니기에. 담은 없어도 마당은 함께 쓰는 곳. 당사자들 간의 선택과 합의가 중요한 그 동네는 명절 때 여성들의 가사노동이나 수컷의 경쟁에서 오는 감정 노동도 없는 공간이 됐음 좋겠다.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이 많을 것 같아 걱정되는 이 동네를 말하고 보니 '이매진'을 닮은 것 같아 조금 쑥스럽지만 존 레논도 오노 요코 같은 아내가 다시 결혼하는 가족은 원치 않을 터.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