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7 |
천재에서 학예일치(學藝一致)의 예술인으로
관리자(2006-07-06 17:23:27)
하얗게 센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자연스럽게 연륜을 드러내고 있는 얼굴의 잔주름, 섬세해 보이는 손. 50년 동안 그림을 업으로 삼아온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 벽경 송계일 화백의 모습은 영락없는 화가의 그것이었다.
벽경 송계일 화백이 지난 5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화력50년 및 정년퇴임 기념전’을 가졌다. 전주에서 30년 만에 열리는 전시였다.
전북대학교 총장선거가 열린 지난 6월 20일 투표를 하기 위해 전주에 내려온 그를 만났다. 그는 현재 경기도 양평의 화가들이 모여 있는 전원마을에 살고 있다.
“그동안 전북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긴 했지만, 생활근거지를 서울로 옮긴지 30년이 됐고, 또 너무 오랫동안 고향에서 전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50년을 정리하는 전시를 통해 제 작품의 변화와 성과를 그동안 후원해주시고 기대해주신 고향분들께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산수 중심의 작품을 많이 해왔는데, 2000년 이후부터는 비구상 작품을 많이 하게 됐거든요. 이 과정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번 전시의 성격을 50년 화력을 정리하는 것과 함께 ‘고향에 대한 도리’라고 말했다. 30여 년 만에 갖는 고향에서의 전시에 사람들의 관심도 컸다.
벽경 송계일은 보기드문 이력을 가진 작가다.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화단의 평도 그렇거니와, 제2회 전국신인예술상대회 장려상 수상, 제1회 백양화주최 전국동양화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 제24회 국전 국무총리상, 목정문화상 등 그가 지금까지 수상한 상의 이력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런 그가 그림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어떤 기가 막힌 에피소드나 비장한 각오를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여름방학 숙제 중에 그림 그려오기가 있었어요. 아는 분이 갖고 있는 풍경화를 빌려다가 그걸 모사했죠. 그런데 그리고 나니까 제가 보기에도 너무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그림 빌린 분께 제가 그린 것을 가져다 줬더니, 모르셨어요. 그 후에 그분께 그림을 다시 가져다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까 깜짝 놀라시더라구요.”
물론 그는 그 전까지 그림을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일년이 지나서였다.
“수학시간이 그렇게 싫었어요. 그래서 수학시간에는 친구들 모습을 장난삼이 그리곤 했죠. 그런데 그 당시 <학원>이란 잡지에 ‘장다리와 거꾸리’라는 만화가 있었어요. 내가 그려도 이보다 잘 그리겠다 싶어서, 나름대로 내 그림으로 바꿔 그려 하숙집 형에게 보여줬더니, 그 형이 그림을 보면서 딱 하는 말이 ‘너는 그림에 천부적이다. 그림 그리면서 살아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에게 화가의 길은 이렇게 뜻하지 않는 곳에서 뜻하지 않게 왔다. 그는 그길로 고모부의 소개를 받아 벽촌 나상목 선생을 찾아뵙게 된다. 그의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셨지만, 벽촌 선생은 그의 첫 스승이 되고 스승의 뜻에 따라 동양화를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다.
“지독히도 열심히 했었죠.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번만 찾아오라고 했는데, 매일 한 작품씩 그려서 찾아갔으니까요. 그런데 매번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구요.”
그렇게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지 1년, 졸업을 앞둔 그는 스승의 권유로 국전에 출품을 하게 된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지 1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쟁쟁한 기성작가들이 참여하던 국전에 출품하기에는 경력도 나이도 어렸었다. 하지만, 그는 기성작가들이 함께 참여한 이 대회에서,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입선’하게 되었다. 그는 ‘천재’소리를 듣게 되었고, 이로써 부모님의 반대도 끝나게 되었다.
그의 진로는 당연히 미술대로 결정되었다. 홍익대학교 미대에 진학한 그는 ‘스케치 풍’의 그림을 줄곧 그리다가, 3학년에 이르러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동양화를 조형적으로 풀어낸 ‘동양화의 현대화’ 작업이 그것이다. 이때 그는 다양한 소재들을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재구성’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한국화의 조형성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평생 그의 큰 자산이 되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다시 ‘극사실주의적’인 그림들을 그리게 됐어요.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고, 그 안에는 치밀한 조형성이 자리잡고 있죠. 가령 비둘기 떼를 그릴 때, 단순히 비둘기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둘기들의 행태며 행동을 약 한달 동안 꼬박 머리 속으로 외웠어요. 그리고 그것을 다시 화폭에 재구성한 것이죠.”
그리고 그는 이 ‘비둘기’ 그림으로 24회 국전에서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1975년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작품의 소재를 ‘산수’로 바꾸게 된다. 한국화의 정통을 찾는 작업이었다. 이때 그렸던 그림들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사실적 경향을 띤 합리주의 산수화’다. 그리고 ‘산수’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작품의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이때부터, 외형을 통해 자연 내부의 원리를 보게 됐어요. 단순한 묘사나 모사가 아닌, 그림에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그는 당시에 ‘합리적 논리성’, ‘개성’, ‘조형성’이 적절히 녹아들어간 것이 그의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10여 년 동안 그의 그림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이 세 가지 요소들은 점점 그 구도나 색채에 있어 그만의 개성이 강조되는 형태로 발전되어 나아가다가, 8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본격적으로 한국화의 ‘조형화’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점점 외형적인 모습은 생략되거나 제거되고 자연의 존재 질서만이 화폭에 남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한국화 특히 산 그림에 있어 선구자적 존재라는 평을 듣게 됐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에게는 하나의 모색기에 지나지 않았다.
“90년도 중반에 이르러 음양에 대한 개념과 상대성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서, 그림에 저만의 조형성이라던가 색채감각, 사실성, 개성들이 정착되기 시작했습니다. 산이라는 주제를 저만의 미의식으로 새롭게 각색하고 연출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만의 산수화가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죠.”
그는 우주 질서의 가장 위대한 미학은 ‘상대성의 원리’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상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깨달은 음양의 조화와 상대성의 원리를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차츰 그의 그림에서 대상이 지워져 버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렇게 해서, 2000년대 들어서부터 그의 작품은 ‘비구상’으로의 전환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는 그가 깨달은 자연의 원리를 그림뿐만 아니라, 생활에도 적용시켜 나아가고 있다.
“음양의 조화나 상대성의 원리는 생활 속에서 ‘중용의 미덕’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중용의 자세를 취할 때 우리 인간들도 가장 아름답고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거든요. 또 제가 깨달은 것들을 생활 속에 녹여나갈 때, 그림도 보다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화력 50년 동안 구상과 비구상, 조형성과 극사실성, 수묵과 강렬한 색채 등을 넘나들며 쉼 없이 새로운 실험을 거듭해온 그는 요즘 또 다른 시도를 준비 중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제 그림은 보편적 음양 논리에서 구체적 상대성을 담아내는 작업으로 변화되어 왔어요. 이제는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상대성, 이를테면 총체적 상대성을 담아내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이제는 한평생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보며 흐뭇해 할만도 할 나이. 하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처음 그림을 배우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그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