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1.4 | [정철성의 책꽂이]
수녀와 안내양
정철성(2003-04-08 09:54:30)
좋은 시란 과연 어떤 시일까? 널리 알려진 시가 좋은 시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왜 시의 경우에는 시장에서의 판매량이 절대적인 기준에 미달이란 말인가? 어떤 작품이 일정한 시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면 그러한 현상의 뒷켠에는 틀림없이 공감의 조류가 흐르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밝혀내는 일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사소한 사건들로부터 시대의 정신을 읽어내는 역사학의 방법이 있는 것처럼 이른바 본격문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면서 독서계를 지배한 대중문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시대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당연히 요구되는 작업이다. 노동현장을 배경으로 경험의 공유를 시도하거나 그것에 동조하는 작품은 여전히 생산되고 있으며 그 양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큼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이제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제금융 이후 경제가 경색에 시달리면서 다시 노동시장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으나 이것이 작품의 생산에 직접 영향을 끼치리라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노동문학이 이윤의 추구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양적 확산을 크게 기대하지 않지만 동시에 대중성의 확보를 일차적인 목표로 삼기 때문에, 그것에 대중문학이라는 표식을 붙여도 괜찮을 것 같다.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이 생산되는 세계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은 의식의 과잉을 낳았고 이것이 결국 작품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반성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문학이 어떻게 사태에 접근해야 하는가를 암시한다. 군말이지만, 나는 대중문학이라는 용어를 중립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대중의 취향에 따르거나 그들의 수준을 의도적으로 낮추어 잡는 통속문학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해인의 {민들레의 영토}를 대중문학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당대의 원로시인 박두진이 {민들레의 영토}에 서문을 붙여주었고 몇몇 문학지들이 서평을 통해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해인의 시들은 사랑과 기도와 순명(順命)을 받아들이고 종신서원을 한, 수녀라는 특수한 직업을 가진 스타 시인의 소박하고 평면적인 시들로 간주되었다. {민들레의 영토}는 이후에 간행된 몇 권의 시집과 함께 소문없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아직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시집이다. 그런데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이런 시집들을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없다. 누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들먹이면 논쟁에 끼어들 채비를 하면서도 이해인의 시들을 깎아 보았던 이러한 태도는 나의 독서가 예상대로 상당히 편향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해인 수녀의 시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이유는, 그녀의 시에도 갈등이 없지 않지만, 적절한 방식으로 해소한 이후의 모습을 표면에 비추는 까닭에 독자의 마음이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소박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지나친 단순화이다. 종교에 귀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다시 문제 뒤로 숨어 버리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스무 살의 나이에 이해인은 고백했다. "겹겹이 나를 닫아 버린 어둠 속을 헤치고 당신 아닌 그 누구를 찾아야 되겠습니까. 섭리이신 당신이여, 나의 자유는 당신의 것입니다." 겹겹이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출가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다. 그가 세상의 관계를 두 번, 세 번 끊어낸 것은, 시도가 성공한다면,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얻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자의 자세를 모든 이들에게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구도의 선례가 종종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 효용에 대하여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공연한 트집은 아닐 것이다. {민들레의 영토}에서 뽑은 이해인의 시와 버스 안내양이었던 김혜자의 시를 함께 읽어보자. 채광석이 편집한 {노동시선집}에는 이름을 모르거나 약력 미상인 노동자의 시들도 있는데, 김혜자가 안내양이었고 [안내양 일기]의 출전이 [민주노동] 제 7호라고 밝혀 놓았다. 대조적인 이 두 편의 시는 인간이 관계를 유지하는 형태의 양쪽을 보여주고 있다. 시의 내용이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분명하기는 하지만, 행간을 사선으로 처리한 무례를 용서하시고,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시라고 부탁드린다. 벗에게 너는/ 내 안에서/ 고운 잇속 드러내며/ 살짝 웃는다 이슬 달고 피어난/ 하얀 도라지꽃 날마다/ 정성껏/ 너를 가꾼다 네가 꽃을 피워/ 나에겐/ 사랑이 되고 네가 살아 와서/ 나의 눈물은/ 반짝이는 구슬이 된다 세월이 가도/ 젊음만 퍼올리는/ 영혼의 샘가에서 순결한 눈짓 마주하여/ 피리 불다가/ 우리는 조용히/ 하나가 된다 안내양 일기--사고 처리 개문 발차 사고가 났다/ 내 잘못도 있지만/ 운전기사와 다친 손님도 책임이 있는데/ 나만 때려죽일 년이다// 빨리 내려라 독촉을 했고 잡아주지 않았으니/ 내 잘못인 줄 알지만/ 넘어진 것은 손님의 실수도 있었다/ 운전수도 급히 부릉대었다// 운전수는 계산을 재빠르게 한다/ 차가 움직였으면 저의 책임이니까/ 안내원의 실수를 강조해야/ 책임회피가 되니 어디까지나/ 차장이 실수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다친 피해자는 이왕 다친 것 치료비 많이 뜯을려니/ 안내원이 떠다밀어 넘어졌노라고/ 이 쌍년 고발해서 밥줄을 끊어놓고/ 모가지를 비틀어 죽인다고 욕지거리다// 병원에 가니 병원 원장 살판났다/ 무릎 깨졌는데 링게르 꽂고 엑스레이 찍고/ 온갖 검사 한참 하더니/ 큰일 날 뻔했다고 으름장 놓고 입원하란다// 치료비 물어주며 사고처리 하는 회사에선/ 일도 못하는 년 병신 같은 년 하며/ 개잡년으로 몰아붙인다// 씹팔,/ 눈에 보이는 인간들 다 물어 뜯어먹고 싶다 SOUTHOLD@chollian.net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