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7 |
시종일관 박진감 넘치는 무대, 다양한 성격창조는 아쉬움
관리자(2006-07-06 17:13:22)
중국 4대기서중 하나인 나관중의 삼국지는 우리나라에서 언제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표적 소설이다. 삼국지와 관련하여 컴퓨터 게임, 만화, TV드리마, 영화 등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오늘의 현상은 이 소설이 얼마나 인기가 있고 사회적으로 파급효과가 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예라 하겠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유입 소개된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폭넓게 애독되고 있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삼국지 산업’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날 정도이다.
이번에 전주대학교 전통문화콘텐츠 X-edu사업단 기획공연으로 남원민속국악원을 초청하여 6월 2, 3일 양일간에 걸쳐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에서 펼쳐진 ‘적벽가’(송순섭 작창, 박병도 연출)는 삼국지를 창극에 맞게 각색하여 무대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삼국지를 토대로 그중 백미인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적벽가’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를 시작으로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과 함께 천하삼분을 꿈꾸는 대목으로부터 장강에서의 적벽대전 이후까지의 전쟁 상황과 수많은 인물들의 책략과 영웅심리를 그린다. 여기서 유비는 비교적 작은 역할로 그려지고 있으며, 조조를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 간다. 극 초반 아직 조조에 대적할 만한 힘을 갖추지 못한 유비는 당양전투에서 패하고 장판교에서 조자룡과 장비의 기지로 위기를 넘긴다. 한편 제갈공명은 조조를 물리칠 계책으로 오나라의 주유를 격동하여 적벽대전을 준비한다. 조조는 오나라 장수 방통의 연환계에 빠져 책사 정욱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승리에만 집착하여 전군에 진군명령을 내린다. 주유의 간청으로 남병산에 오른 제갈공명은 칠성단에 제를 올리며 동남풍을 기원한다. 주유군은 황개장군을 필두로 조조군에 화공을 일으키며 일대 공격에 나서자 조조는 뒤늦게 자신이 속았음을 알아차리지만 이미 때는 늦어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백만 대군을 잃고 오림 계곡으로 패퇴한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오림 계곡에 관운장을 잠복시켜 조조를 생포한다. 그러나 관운장은 전일에 입은 은혜를 갚으려 생포한 조조를 풀어준다. 진중으로 돌아온 관운장은 군율을 어긴 중죄인이라며 죽음을 요청한다. 이에 유비는 지난날 도원결의에서 생사를 도모하자 했던 대의를 위해 만세유전하고 ‘적벽가’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와 같이 남원민속국악원의 창극 ‘적벽가’는 삼국지의 내용 중에서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영웅호걸들의 기개와 무용담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무대 활용과 적벽의 수상전에 있어서 대형 전함들의 격전장면을 형상화 하여 박진감 있는 무대를 표현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더욱이 ‘적벽가’는 사설과 소리가 남성중심의 묵직하면서도 힘 있는 발성을 요구하여 아무나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판소리 다섯 바탕의 하나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운 한자성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이고, 자막을 통하여 소개되는 원문을 보아야 이해가 가능할 정도다. 또 삼국지에 익숙한 관객이라 할지라도 자막을 활용하면 원문과 함께 ‘적벽가’의 심오한 이면을 제대로 살필 수 있어 관극에 도움을 줬다. 한편 출연자의 소리가 불분명한 발음이나 음악에 묻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보완해야 할 과제다. 또 하나 창자들이 수많은 독공을 통하여 소리를 내지만 자막을 통해야만 극의 내용을 전달하는 시스템에 대한 개선이 요구된다.
‘적벽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삼국지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인물군으로 이뤄져 있다. 일종의 전형성을 유지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우리 전통적 창극의 특징이다. 이번 공연의 인물군 역시 그 전형적 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유비의 인자함이나 부드러움, 조조의 포악성이나 잔인한 성격의 여과 없는 표출이 그것인데 창극이나 판소리 전문 소리꾼들은 연기에 있어서 창의적 인물 성격구축이 쉽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흔히 저간에 회자되는 삼국지의 인물군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처세술의 보고로 인식되곤 한다. 여기서 조조의 처세술과 치세에 대한 견해가 많이 달라진 요즘 극중의 전반적인 조조의 역할은 철저히 악인형으로 표현되고 있어 ‘적벽가’의 주인공이지만 결말을 쉽게 유추할 수 있게 성격을 노출하는 단점으로 보인다. 이것은 조조나 유비, 주유 등의 등장인물 역시 나름대로 정당성과 인간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도록 극적인 긴장감이나 결론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에 어느 정도 ‘상상의 자리’를 비워두었으면 어떨까 한다.
극중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관운장은 장판교 전투 이후 포로의 신세가 되는데 조조는 관운장의 인품과 장수로서의 덕목이 출중함을 부러워해 극진하게 대접한 적이 있다. 이후 관운장은 적벽대전에서 패전한 천하의 공적 조조를 오림 계곡에서 생포하지만 이전의 관계로 해서 풀어주고 만다. 이러한 인과관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번 창극 ‘적벽가’의 시간적 제한과 서술상의 간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시종일관 극적 긴장감이 넘치는 ‘적벽가’는 공격을 앞둔 조조 진영의 군사들의 놀이와 향수를 달래는 대목에서 한 숨 돌리는 듯 하다. 그러나 이내 조조는 불길한 심사로 인해 부하장수 시해장면으로 급반전하며 다시 격랑을 헤쳐 나간다.
이렇듯 창극 ‘적벽가’는 남성미 넘치는 역동성과 풍부한 우리의 소리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판소리 다섯 바탕의 하나지만 무대의 제한적 요소와 창극 전문배우의 부족 등 제반 여건의 미흡으로 인하여 창극화 하지 못하고 국립창극단에서 기획한 두어 번의 무대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남원국립민속국악원에서 창극 ‘적벽가’의 심혈을 기울인 창극화는 제작진의 노력을 여실히 살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점점 대형화되어가고 있는 현대의 공연예술은 빈곳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꽉 채워진 무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공연계 현실 속에서 판소리 ‘적벽가’의 창극화는 우리소리의 저변확대와 전통계승을 목표로 치밀한 기획과 행정적 추진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또 판소리 다섯 바탕뿐만 아니라 창작창극의 무대화에 필요한 전문배우나 소리꾼의 양성과 발굴도 절실하다. 그때그때 공연에 따라 외부출연자나 객원연주자를 교섭하여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하니 서로간의 호흡이나 연기적 결속력이 부족한 듯한 인상이 짙다. 물론 창극단이나 예술단이 창극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소리의 전승과 재창조를 이룩하고 보존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로써 판소리의 창극화에 걸 맞는 제도적 뒷받침이 요구된다 하겠다.
류경호 | 전북 완주 소양에서 태어났다.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박사과정를 이수했다. 현재 전라북도연극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 13회, 21회 전국연극제 연출상을 수상했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상, 전라북도지사 공로패, 전주시예술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