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7 |
[채식] 음식이 품성을 기른다
관리자(2006-07-06 17:02:32)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어떤 형태로든 먹이를 먹음으로서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렇듯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다는 점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는 동일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를 따져 생각해 보면 많은 차별이 생긴다. 특히 사람과 같이 자연 상태 그대로를 먹이로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요리라는 개념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먹이가 아니다. 그 속에는 역사가 있고 사상이 있으며 문화와 예술이 있다. 때문에 요리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중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며,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총체적 삶의 결과적 표현이다. 그래서 각 나라와 민족의 고유한 음식문화는 그 나라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 사상과 예술 등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지금 자기 자신의 능력에 스스로 도취하여 그런 총체적 삶의 결과인 요리의 근본을 망각하고 오직 감각적 입맛과 즐김을 위한, 지극히 인위적이고 자극적이며 획일적인 맛만을 추구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맛과 그것에 맞추어 대량 생산된 인스턴트식품에 빠져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천 년 이어온 우리 고유의 음식에 대한 관념과 문화를 너무나 쉽고 자연스럽게 내버리고 서양의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추구해가고 있다. 일반대중은 물론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조차도 음식에 대한 우리 고유의 관점이나 원리를 무시하고 결과물이 주는 맛이나 외형적인 장식성으로만 서양의 그것과 비교하고 평가하여 스스로 비하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실 우리가 추구해온 음식문화는 서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서양의 그것은 신체를 기르기 위한 것이면서 감각적인 맛의 즐김에 있고, 우리의 그것은 이상적인 인품과 정신세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인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이며 만물과의 공존과 공영을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다름의 가치나 우리의 음식철학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서양의 기준에 따라 단순히 비교하고 평가하여 버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우선 모든 음식의 맛을 일정한 맛으로 포장하여 과장하기 때문에 고유의 맛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획일화하고, 개성 없이 만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혀를 자극하는 과장된 맛은 사람의 몸이 원하는 만큼보다 더 많은 양을 입맛에 끌려 먹게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만과 질병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맛의 유혹을 끊지 못하다 보면 다른 부정한 유혹에도 약한 신약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 할 수 있겠다.
물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웃을 수도 있지만 똑같은 음식이라도 좋은 사람과 함께 분위기 있는 곳에서 먹을 때 그 음식이 더 맛있고 행복한 마음이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동물들이 어떤 먹이를 먹느냐에 따라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런 인공첨가물들이 사람에 미치는 영향이 어떨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육식 동물은 포악하고 성질이 급하고, 초식동물일수록 온순하고 느리며, 과일이나 열매를 주로 먹는 동물 일수록 약삭 빠르고 꾀가 있다는 것이 알 수 있는데 사람이라고 이런 자연의 법칙에 예외일 수 있겠는가?
물론 사람의 경우는 동물과 다른 특별한 지혜가 있고 또한 각자 자신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과 달리 먹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결코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설령 먹는 것 자체로는 특별히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뭔가 의미 있는 특별한 음식이라면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특별함으로 인하여 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모유와 우유가 설령 성분적으로 비슷하거나 오히려 우유가 월등히 우수하다 해도 아기에게 미치는 영향을 비할 바는 못 되고 가게에서 파는 포장된 밥이 아무리 좋아도 가정에서 정성으로 해먹는 밥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똑똑한 인간들은 모유를 버리고 영양가 높은 우유를 먹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가게에서 파는 밥이 쉽고 편하고 경제적이라고 사먹어도 아무런 문제없다고 점점 많이들 사먹는 것이 현실이니 웃을 일 아닌가?
이런 것들은 잘못된 서양의 음식관과 영양학으로 대변되는 식품 과학에 빠진 현대인들의 자기 모순적인 대표적 사례이다. 심증적으로는 모유가 좋겠다든지 정성으로 한 밥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바쁜 세상에 효율적이거나 영양학적으로 더 우수하다 하다고 믿는 까닭에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더 많이 추구해가고, 기업들의 상업주의는 이를 이용 돈벌이에 급급하고 있으니 갈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되어 갈 것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 조상들은 한솥밥을 먹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고 혈연의 정을 나누었으니 음식 자체는 물론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까지도 사람들의 심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실제 우리 조상들은 이런 것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해 놓은 것은 없다. 다만 음식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 것을 보면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술을 예로 들어보자. 서양이 우수한 것은 알코올이 우리 몸에 작용하는 원리와 폐해를 잘 알아내서 밝혀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밝혀 놓고 모든 잘못을 알코올의 독성 때문이라고 말해버린다. 이것은 음식과 먹는 사람이 상호관계 속에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 쪽을 독성물질로 규정지어가는 것이어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식으로 보면 그것이 아니다. 술이 되기 위해서는 밥이 다 삭아야만 된다. 우리의 소화기관에서도 밥이 다 삭아야 흡수된다. 삭는 과정이 몸 밖에서 일어났느냐 몸 안에서 일어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술은 사람의 소화기관을 거치지 않았지만 이미 밖에서 삭았기 때문에 우리 몸이 바로 흡수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술은 위에서 바로 흡수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소화과정이 없이 바로 흡수되기 때문에 과정 없이 결과만 얻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면 노력 없이 소득을 많이 얻는 것과 같아 몸은 게을러지고 정신은 날로 황폐하고 성급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원리는 술에서 그치지 않는다. 엿이나 설탕 또한 술과 마찬가지로 이미 삭아서 소화되어 나온 것처럼 바로 흡수될 수 있다. 때문에 사람의 성정을 황폐하고 급하게 하는 데는 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록 쌀을 고아 만든 엿이라 할지라도 어린이나 청소년에겐 많이 먹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아닌 청소년기에는 달고 부드러운 음식보다, 거칠고 특별한 맛이 없는 담백한 자연 상태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심성이 먼저 겸손해지고 느긋해지며 맑아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우리 조상들의 관점으로 보면 발효식품과 슬로우 푸드를 먹고 자란 아이가 인스턴트식품과 패스트푸드를 먹고 자란 아이에 비해 성격이나 심성이 비교적 안정되고 느긋하리라는 생각을 해보다면 비과학적이라고 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이렇듯 살아온 우리의 조상들은 어디에도 음식이 사람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논문 한편 써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삶의 이치이기 때문에 쓸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삶에서 실천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거의 자연 상태로 섭취 한다 볼 수 있는 나물 하나를 무치더라도 소금으로 간을 하지 않고 간장이나 고추장 된장으로 간을 맞춘 것은 새로운 것과 묵은 것을 조화시키는 지혜였다. 이렇게 살아온 민족이 오늘날 스스로 가진 위대한 문화를 버리고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서양의 모순된 삶을 흉내 내며 기를 쓰고 따라가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김두경 | 서예가. 서예문화원 ‘문자향’ 대표와 선비문화체험관 ‘우리누리’ 관장님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