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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4 | [문화비평]
심청, 이피게니아, 바리데기, 도립국악원
곽병창(2003-04-08 09:52:31)
심청, 이피게니아, 바리데기, 도립국악원 1. 심청이를 아십니까? 이피게니아는, 바리데기는요? 불행한 운명의 희생물로 바다에, 제단에, 지옥에 던져진 제물들입니다. 그지없이 착하고 효심 가득한 그들, 한 번도 제 몸에 호사한 적 없던 소녀들은, 눈 먼(병 든) 아비의 소망을 풀어주기 위해 제물이 됩니다. 왜 하필 예쁘고 착한 이들이 줄줄이 뽑혀 나가며 제물이 될까요? 경우야 제각각 다르겠지만, 불쌍한 처지에 떨어져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선량한 인물이 불행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신의 권위에 대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랍니다. 2. 우리 시대의 신은 누구일까요? 자본인가요, 시장인가요? 지금 우리 지역 국악의 신세가 저 가련한 소녀들과 비슷하게 되어 갑니다. 새로운 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도립국악원은 지금 오갈 데 없이 제물로 붙들려서, 이무기 낼름거리는 동굴 속으로 갈지, 인당수 푸른 물에 빠져 죽을지 모르는 처지입니다. 이른바 민간위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요즈음의 모습을 보면, 국악원이 시장논리에 맞춰 살지 못했다는 누명을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 것입니다. 소리의 전당과 도립국악원 예술단을 한꺼번에 떠 안고 운영하게 될 주체가 누구든, 지금처럼 부족한 도비 지원 수준이라면, 이를 메우기 위해 인원 절감을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나라일 맡은 이들이 잘못해서 나라 잃었을 때, 음악이고 예능이고 연희고 온통 다 빼앗겼었습니다. 교묘하게 버림 받았던 그 몇십 년 동안, 우리 음악, 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민요, 무가, 풍물굿 등의 민속 음악은, 천 길 물 속 심청이처럼, 황천을 떠돌던 바리데기처럼, 은인자중 세월을 보내면서 제 몸 간수하느라 애썼습니다. 그러다가 간신히 나라 찾아서, 정신 추슬러서, 버렸던 제 자식 다시 건사하기 시작한 지, 온나라 통털어 둘러봐도 이제 40 년 채 안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겨우 보기 좋을 만큼 봉오리 봉긋 맺히게 된 겁니다. 그게 이른바 관립국악원들의 요즈음 모습입니다. 이름도 아름다운 예향, 소리의 고장 전라북도에 도립국악원 생긴지는 만 십오 년 겨우 넘겼습니다. 그런 참에 저 뒷산 건지산 기슭에 난데없는 괴물 하나 들어서서, 이 고을 백성 다 잡아먹기 전에 처녀 하나 내놓으라고 으르렁거립니다. 생긴 모양 또한 듣도 보도 못하게 큰 덩치에, 금빛 은빛 번쩍이는 비늘을 달고 납작 엎드려 요지부동입니다. 그 꼴 보아하니 앞으로 몇 수십 년은 너끈히 이 동네 백성들 등골 빼 먹을 자세인지라, 서둘러 제물 하나 차려 올리자 하고 둘러보니, 만만한 게 왕년의 효녀 심청이요, 막내딸 바리였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세계화의 새 천년을 맞이해서, 버림받은 딸 도립국악원은, 뒷산 괴물 소리의 전당을 달래기 위해 오늘 또 다시 만경창파 뱃머리에 올라섰습니다. 3. 이런 생각이 공상으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민간 위탁은 안 될 말입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민간위탁 논의의 출발점은, 소리문화의 전당에 드는 막대한 손실을 민간에게 전가하려는 발상에 있습니다. 그 소용돌이에 도립국악원 예술단, 연구단, 교수부가 몽땅 팔려나갈 처지가 된 것입니다. 모든 자료가 말해주듯이, 전국의 어느 관립예술단도 이런 방식으로 그 경영 주체를 민간화해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유야 여럿이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 동안 국악을 시장에 내맡겨도 좋을 만큼 키워오지 않은 탓입니다. 또한 이른바 대중화를 그 지향점으로 삼고 전통의 것을 새롭게 혁신하는 일은, 어느 시기, 어느 상황을 막론하고, 민간 예술가들의 자생적이고 실험적인 노력에 맡겨야 합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전통을 혁신하고 재창조하는 일보다, 전통의 보존과 계승을 그 첫째의 존립목표로 삼고 있는 관립예술단이, 시장의 논리대로만 움직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극장 경영의 기술만 믿고, 또는 몇 차례 공연의 흥행실적만 믿고, 나라와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 온 관립예술단을 경영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에게, 섣불리 키를 넘겨 주려는 발상은 바뀌어야 합니다. 4. 막내딸 이피게니아를 죽여 그 피로 얼룩진 바람을 타고 전쟁에 나갔던, 그리스 비극의 영웅 아가멤논 이야기도 심청 얘기와 닮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자식은 그 어미를 죽이고 하던 끔찍한 집안이, 그 끝없이 계속될 것 같던 복수극을 마감하는 것은 저승길 문턱까지 갔다가 신들에 의해 다시 살아난 이피게니아입니다. 그녀에 의해 비로소 모든 잘못들이 용서되고 기나긴 복수극이 끝나며, 나라엔 평화가 찾아옵니다. 바리데기는 미움이란 미움은 혼자 다 받고 산길 물길 저 멀리 지옥길까지 팽개쳐졌다가, 제 아비 병들어 백약이 무효할 때, 지극 정성으로 돌아와 죽은 아비를 살려 냅니다. 심청 얘기의 결말도 버림받았던 주인공에 의한 해피엔딩입니다. 국악은 지금 비록 겉모습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동안 군국주의, 근대화 지상주의 등 통치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어 버림받았다 돌아온 존재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효녀로서의 참모습을 해피엔딩으로 보여주기도 전에, 또 다시 시장논리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딸들의 고난이 길었다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집안에, 나라에 평화가 왔던 일을 기억해 볼 일입니다. 다시 태어나서 이제 막 열여섯 살 먹은 도립국악원더러, 또 다시 저 깊은 물결에 몸 던지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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