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7 |
몸으로 거니니 마음으로 느껴지더라
관리자(2006-07-06 16:50:25)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는 다행히도 저녁만을 겨냥한 것이었는지 날은 화창했다. 오전 10시 군산대학교에 모인 월명중학교 2학년 학생들 열다섯 명, 군산대, 우석대, 원광대 학생들 열한 명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까지 총 서른다섯 명이 함께 버스에 올라타는 것으로 문학예술기행은 시작되었다. 10일 군산을 출발로 고창, 김제, 부안으로 이어질 예술기행은 지역 곳곳에 산재해있는 문화·문학 유산을 살펴보고 그 소중함을 느끼고자 전북작가회의가 국무총리 산하 복권기금을 받아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어떤 유산들이 내 고장에 있는지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실주민들, 특히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
처음 찾은 곳은 고은 시비가 있는 은파유원지였다. 본시 쌀농사를 위해 축제한 제방이라 하여 미제 방죽이라고 불리었던 은파 유원지는 고은문학의 요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군산에 사는 사람치고 은파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중학생들 중 몇몇은 고은 시비가 있는지 몰랐다는 반응, 시인에 대해서도 자세한 이력은 모르고 이름만 들어본 정도. 문학과 시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에게 왜 모르냐고 나무랄 수는 없는 일, 모르는 것은 알려주면 되고, 제대로 가르쳐주어야 관심도 자라나는 법이다. 이 날 강사역할을 맡은 박태건 시인은 미리 나누어준 자료와 즉흥적인 생각을 토대로 재치 있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다음 이동한 곳은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다닥다닥 모여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의 콩나물고개. 채만식의 『탁류』에서 정주사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올랐던 콩나물고개의 선양고가교에는 소설비가 세워져있었다. 사람의 왕래가 뜸한 곳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탁류』의 소설비. 군산이 채만식이라는 작가와, 그의 대표작 『탁류』에 얼마나 큰 자긍심을 걸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흔적이었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버스 안에서는 퀴즈를 내고 맞히는 목소리로 분주했다. 문제가 떨어지자마자 참가자들은 번개같이 답을 말하고 과자를 얻어갔다. (우스갯소리로) 문제가 쉬워서 상품을 탔는지, 상품이 가벼워서 문제가 쉬워졌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채만식문학비가 있는 월명공원과 『탁류』 속 정주사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째보선창(군산내항), 2001년 건립된 군산하구둑 옆의 채만식문학관, 임피 계남 마을에 있는 작가의 묘,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폐허라고 하기도 민망한 선생의 생가터까지 군산에 남아있는 채만식 작가에 대한 모든 흔적을 한번 훑어보는 작업이 이어졌다. 군산대학교의 이종민 학생은 작가의 생가터에 대해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사람이 살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훼손된 모양 때문이었다.
모든 기행을 마치고 군산대학교로 다시 돌아온 오후 5시 쯤, 작가와 함께 하는 문학 워크샵이 시작되었다. 이 날 행사에 참석한 전북작가회의 최동현, 유강희, 박태건, 경종호, 박성우, 문신, 최기우 총 일곱 명의 작가들은 참가자들을 나누어 맡아 지도했다.
본격적인 워크샵에 앞서 군산대학교 최동현 교수는 “문학작품은 아름다우나 작가는 아름답지 못하다. 작가는 작품을 하나씩 내놓을 때마다 망가져간다. 결국 작가가 되겠다는 것은 나를 망가트려가면서 아름다운 것을 내어주겠다는 것이다”며, “다른 이를 위해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을 남에게 베풀어내는 작가의 희생정신을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월명중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행에 참석한 이현주 선생님은 이렇게 확 트인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많은 사람들이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중학생들이 보기에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팜플릿에 대한 지적으로, 중·고등학생에서 대학생까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꾸며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첫 예술여행의 가장 큰 아쉬움은 적은 인원이었다. 많은 사람이 참가를 원한다고 해서 모두다 받을 수는 없겠지만 40명이 주최 측이 생각하고 있는 순수 참가인원이었다. 사실 이번 군산기행은 홍보와 준비가 조금 미흡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리 없다면 이들의 다음 기행에 동행해 볼 일이다. 귀와 필기구로 하는 공부는 평가가 끝나면 사라진다. 다시 찾으려는 노력도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이광웅 시인의 “목숨을 걸고”라는 시를 가르쳐줄까? 가르쳐주더라도 그것을 모태로 그 시절 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리어지던 노래까지 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 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던 때가 있었다. 의자에 얼마나 오래 앉아있느냐에 따라 성적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갇혀있는 교육에 의한 지식은 그 폭 역시 좁다.
문학예술기행은 강압적인 제제가 없어 조금 산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연과 자유의 선생님이 일대일로 따라다니며 마음의 교육까지 맡아주고 참가비도 없이 식사, 간식, 정당한 글 대결로 상품권까지 준다는데 망설일게 무엇인가.
| 송경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