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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축구, 섹스 그리고 결혼
관리자(2006-06-10 11:08:37)
『아내가 결혼했다』 (글 박현욱, 문이당 펴냄, 2006)
글 | 정철성 문화저널 편집주간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두 남자와 결혼한 한 여자의 이야기인데 여자의 첫 남편이 서술자이다. 스스로 오쟁이진 남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뜻밖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이 소설이다. 덕훈과 인아가 섞이게 된 핑계는 먼 나라 스페인의 라이벌 축구팀 사이의 시합이었다. 이를 계기로 덕훈은 축구와 그들의 관계를 샌드위치처럼 뒤섞어 쌓아간다.
축구에 이런 역할을 맡긴 것은 작가의 자의적인 선택이라고 진단함이 합당하다. 인간관계의 복합한 얽힘은 비유의 폭을 확장시킨다. 남녀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하여 스포츠를 끌어온다면 종목을 가릴 필요가 없다. 독신주의를 육상이나 수영 같은 기록경기에 비유함에 수긍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재경을 포함한 이들 삼인의 이중결혼과 축구 사이에서 필연적인 관계를 찾는 일 역시 데데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올림픽보다 더 많은 인구가 지켜본다는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있으니 선택의 시점은 절묘하다. 그러나 다른 경기도 나름대로 열광적인 팬들을 확보하고 있고, 다자간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야구가 더 어울릴 수도 있다. 결국 묘미는 축구가 아니라 축구와 그들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방식에 있다.
세 인물은 허구의 산물이고 축구는 현실이다. 덕훈의 서술에 끊임없이 반복하여 등장하는 축구 이야기가 인물 부분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축구에 대한 덕훈의 언급을 살펴보면 그것은 축구장에서 일어난 일의 기록뿐 아니라 선수들의 기묘한 행태와 어록을 비롯하여 축구에 관심을 보인 유명인사들의 일화까지 다양하게 포섭한다. 축구 부분이 인물의 현실감 확보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여느 운동과 마찬가지로 축구장은 무대이고 선수는 그 위의 연기자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낡은 비유에도 시합의 바탕에 보여주기 위한 약속 체계가 깔려 있다는 점이 숨어 있다. 그런데 막이 내린 뒤 배우에게서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경기장 밖에서도 축구선수는 축구선수로 행동하도록 요구받는다. 이점이 축구를 연극보다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축구장은, 요즘말로 하자면, 가상현실의 공간이다. 현실은 축구를 바꾸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축구로 인하여 변화가 온다면 그것은 축구 자체가 아니라 축구와 현실의 관계에서 비롯한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분위기는 가상현실의 현장으로서 축구와 궁합이 잘 맞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술자 덕훈의 경우 진술과 행위의 성실성에 결함이 있을 뿐 아니라 적당히 무능한 인물인데 특별한 상황을 맞아 처신함이 믿을 수 없게 유연하다. 인아의 경우에는 현실성이 더 떨어진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는 “최고의 섀도 스트라이커”이며, 요리의 달인이고, 사려 깊은 독서가이며, 두 남자의 두 집 살림을 척척 해내는 절정고수이다. 이들의 결합에 장애가 되는 요소는 미리 제거되어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덕훈은 “5남매 중의 막내이며 (5남매 위의 배다른 두 누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강릉에서 큰 형과 같이 살고 있으니 시댁에 대한 부담은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아의 부모는 미국에 계신다. 또 다른 남자 덕훈의 집안에 대하여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혼사를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환원시킬 준비가 미리 갖추어진 셈인데, 이 역시 드문 경우이다.
개인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기적 자유주의자인 인아가 반사회적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이 소설이 제기하는 폴리가미, 또는 폴리아모리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체제에 반항하면서 동시에 순응하는 이중성은 제도의 감시를 피하면서 욕망의 충족을 시도하려는 인물의 의도에 어울린다. 인아가 말한다. “나는 모든 걸 다 가지려는 게 아니야. 나는 다만 남편만 하나 더 가지려는 것뿐이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가 오면 인아는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선택권을 상대방에게 던져 놓는다. 한편 인아의 교묘한 말솜씨에 휘둘리는 덕훈이 사실은 이런 게임의 공범자라는 증후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 여자, 두 남자의 결혼생활은 아이의 탄생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간다. 덕훈은 유전자에 의지하지 않고 부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인아의 선언 “이 아이는 내 아이야”는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사일 것이다. 덕훈과 재경은 이제 아내와 딸을 중심으로 재배치된다. 이 한지원의 탄생, 덕훈의 입원, 모녀의 미국 나들이, 그리고 지원의 폐렴 등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덕훈과 재경은 운명적으로 화해한다. 이윽고 마지막 탈출구가 뉴질랜드로 결정된다.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라지만, 삶이 어디 같을 수야 있을까마는, 오고가는 길이 참 쉽게 열린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부언하자면, 인아와 덕훈의 신혼여행지도 뉴질랜드였다.
소통의 부재는 덕훈의 서술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덕훈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괄호 안의 방백은 재미있게 읽힌다. 그것은 소설과 독자 사이에서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인물 사이에서는 공감을 피해 떠도는 유령의 목소리일 뿐이다. 영화와 인터넷 게임과 대중가요가 덕훈의 주요 참고자료라는 점도 속도와 가벼움으로 표상되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현실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별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소문난 난봉꾼 병수를 두 번에 걸쳐 상당한 길이로 언급한다. 실현가능성을 묻어두고 논리적으로 살펴보자. 모노가미의 폐해가 아니라 폴리가미의 이익이 전자의 주도권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계약 위반이 무시되는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의 폭력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러나 작중의 어떤 인물도 도전을 시도하지 않는다.
광고는 이 책이 “두 남자와 결혼해 버린 발칙한 아내!”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발칙한 여인의 시도를 기발하게 엮은 한바탕 소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