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6 |
[전주대사습놀이] 동지풍속에서 국악 등용문까지
관리자(2006-06-10 11:05:02)
글 | 김성식 문화저널 편집위원
동짓날 풍속은 다 아는 바이고, 과거 전주의 동지 풍속 가운데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대사습놀이다. 이날 전주사람들은 집집마다 동네마다 팥죽제를 지낸 뒤, 해질녘이면 다투어 관아를 향했다. 긴긴 동짓날 밤을 꼴딱 새워도 아쉽기만 한 대사습구경차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전주사람들 속담에 큰 잔치만 보고도 ‘대사습같다’고 했을까.
현재 전주대사습에 관한 문헌상 기록은 1940년 조선일보에서 발간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뿐이다. 그러나 이 기록마저도 ‘대사습’의 기원이나 유래, 또는 성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아무개 명창이 ‘대사습에 참가하였다’는 기록정도만 보일 뿐이어서 매우 불충분하다. 『조선창극사』 중에서 전주대사습과 관련된 명창은 유공열과 정창업 뿐인데, 유공열 명창에 관해서는 “30세경에 전주대사습장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비로소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정도이다.
다만 정창업 명창과 관련해서는 전주대사습에 참가하여 벌어졌던 의미있는 일화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전주부 통인청(通人廳) 대사습장에 참여하여 <춘향가 첫대목>을 부르는데, ‘이도령이 광한루 구경차로 나갈 때 방자 분부 듣고 나귀 안장 짓는다. 나귀 안장 지을 적에 나귀 등에 솔질 솰솰하는 대목’에 이르러 가사가 막혀 버렸다. 별수없이 가사가 생각나기를 바라면서 ‘나귀 등에 솔질 솰솰’하는 대목을 쩔쩔매어 수도 없이 반복하였다. 그래도 가사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좌중은 ‘저 혹독한 솔질에 그 나귀는 필경 죽고 말테니 차마 더 볼 수가 없다’하고 이내 퇴장시켰다. 그 뒤로 정창업은 일시 낙명(落名)이 되어서 수년간 소리를 중지하고 근신하였는데, 이는 명창으로도 혹 실수가 있다는 것을 전하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아쉬운 대로 위 두 가지 기록만 종합해도 과거의 전주대사습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전주대사습은 과거에도 ‘등용문’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경연대회가 아니라 축제형식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쳐 명성을 얻는다는 등용문이다. 둘째는 전주대사습이라는 행사 주체가 전주부(全州府) 통인청이라는 점이다. 즉 전주 동헌의 하급관리인 통인들에 의해서 주도된 행사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전주대사습에 참가하여 만약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그동안 쌓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질 정도로 막강한 권위를 지녔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좌중은 ---- 퇴장시켰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전주대사습에 참가하여 실력을 어지간히 발휘하지 못하면 무대에서 쫓겨날 정도로 전주 관객들의 수준이 높고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일테면 귀명창 천지였던 것이다.
한편 1992년에 전주대사습놀이 보존회에서 발간한 『전주대사습사』에 의하면, 전주대사습은 조선후기에 전주부성의 통인들이 동짓날 밤에 이름난 광대들을 초청하여 판소리를 듣고 노는 잔치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그 시작 시점과 단절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고, 다만 일제에 의하여 강제 중단된 1905년 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주대사습은 전주부성과 전라감영의 경쟁적 대결이었다. 즉 전주부성을 관할하던 전주동헌과 전라도를 관장하던 전라감영이 경쟁적으로 이름난 광대들을 대사습놀이에 초청하여 관중의 많고 적음으로 우열을 가렸다고 한다. 따라서 전주대사습의 본격적인 준비는 한달 전부터 시작되는데, 전주동헌과 전라감영의 통인들이 각각 이름난 광대를 찾아서 각지로 수소문하는가 하면, 수십리 밖에 사는 광대라도 불원천리하고 초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청에 미리 초대한 후에는 이들이 최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도록 솜씨 좋은 음식집을 지정하여 숙식케 하였다고 하니 그 대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이렇듯 광대들은 전주대사습에 참가하는 자체만으로도 더없는 영광이자 소원이었다. 소리꾼에게는 그만큼 영예로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후기 전주는 이미 판소리 전통이 뿌리 깊게 착근하여 소리를 알고, 듣고, 평가하고, 열광하는, 일테면 소리문화가 확고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런데 대사습놀이가 계속되면서 동헌과 감영 간에 경쟁이 과열되어 통인들끼리, 한량들끼리, 또 관중들끼리 설전이 벌어지거나, 심지어 투석전까지 벌어지는 등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자 전라감영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차단하기 위해서 대사습을 격년제로 개최하거나, 아예 동짓날을 피하여 7월 연(宴)날(고종황제의 생일 축하행사를 하는 날)에 명창들을 초대하였다고 한다. 이로보아 전라감영 측에서 전주부 측과 겨룸에 있어 열세를 면치 못했던 것 같고, 또 전주를 텃밭으로 대대로 세습되던 전주아전들의 위세를 짐작할 수도 있겠다.
전주대사습은 1905년 무렵 단절된 이후, 약 70년 만인 1975년에 부활되었다. 전라북도 국악협회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전주대사습놀이 부활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해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를 경연대회 방식으로 개최한 이래 올해로 36회 째를 거쳤다. 다행히도 단절되기 이전의 모습대로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의 국악인 등용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악 꿈나무 육성의 일환으로 시작한 <전주대사습놀이 학생전국대회> 역시 막강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개최 시기에 관해서 논란이 있지만, 『대사습사』를 위한 조사시 다수의 고로(古老)들이 증언한 바가 한결같이 동짓날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과거의 전주대사습은 동짓날 통인놀이였음을 부정할 단서가 없으며, 1975년 부활 당시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전주시민의 날인 단오날로 개최시기를 잡은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2000년부터는 <전주4대축제>에 맞춰 양력 5월 5일을 전후한 때로 옮겨졌다. 따라서 개최시기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이나 절기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재의 권위와 전통을 여하히 계승하느냐가 더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전주대사습은 과거 동짓날 밤에 통인청 앞마당에 호엽등과 숯불을 밝혀놓고 소리판을 벌려왔던 전주만의 동지풍속이, 오늘날 국악계 최고의 등용문으로 부활한 것이다. 옛부터 전주를 두고 “관리는 아전만 못하고, 아전은 기생만 못하고, 기생은 소리만 못하고, 소리는 음식만 못하다”는 말이 전해온다. 전주의 맛과 멋과 흥과 정체성까지 제대로 담아낸 표현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