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6 |
[이목대]사라진 이목대, 그러나 이목대는 있다
관리자(2006-06-10 10:53:02)
글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이목대를 찾아가는 길은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오목대를 올라 본 사람이라면 동쪽 승암산 자락으로 이어진 기린로 위의 구름다리를 보게 될 것이다. 이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기린로를 몇 미터 앞두고 조그마한 비각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이목대라고 하는 것은 이 비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목대는 오목대와 같이 돈대(墩臺, 조금 높직한 평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목대, 이목대, 간납대 등 중바위 자락에 있는 이들 지명은 중바위에서 흘러 내린 능선이 발리산을 이루고 이 발리산자락에서 서쪽, 북쪽을 흘러내려 튀어나온 낮은 구릉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대’이다. 오목대는 이성계와, 이목대는 이안사와, 간납대는 이흥발,이기발 등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들이 확인할 수 있는 돈대는 오목대 뿐이다. 말 그대로를 놓고 생각한다면 이목대와 간납대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이목대는 일본인들이 전라선을 놓으면서 깍아 내 버렸고, 옛 영생학교 부지였던 간납대는 이제 잘려나가 평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우리들이 흔이 오목대 이목대 하는 것은, 오목대처럼 구릉을 가리킨다기보다 오목대와 이목대에 있는 고종황제의 ‘비(碑)’를 칭한 것이다. 지방문화제 제16호도 돈대라기 보다는 비석을 지정한 것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라져 버린 이목대는 없지만 여전히 이목대가 존재하는 것은 그 비석 때문이다. 이목대의 비석은 1900년 고종황제가 직접 “목조대왕이 살았던 옛 터(穆祖大王舊居遺址)”라 써 내린 것이다. 이목대가 있던 곳은 그 옛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가 대대로 살아왔던 곳이다. 전주의 유력한 토착세력이었던 이안사는 전주지사·산성별감과 관기(官妓) 문제로 대립하다 170여호의 주민들을 거느리고 삼척현으로 옮겨 약 17년을 살다 1290년 덕흥부(의주)로 이주한 뒤 원에 귀하하였다. 그뒤 이안사의 후손은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에 귀부할 때까지 함흥일대를 다스렸다.
이목대는 이안사가 삼척으로 떠나기 전까지 대대로 살아 왔던 자만동을 감싸고 있던 구릉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주 토착세력이었던 전주이씨가 세거하였던 곳이다. 전라선 철길이 놓이면서 사라진 이목대는 기린로가 뚫리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철길과 도로로 사람들이 동선이 단절되면서 점차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이목대와 관련된 목조 이안사의 이야기는 후대에 각색된 흔적이 역력하지만 전주지역의 설화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 이목대에서 한벽당, 각시바위, 서방바위, 호운암, 장군수 등 숱한 문화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문화터미널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전주의 문화적 전통으로 조선왕조 관향지라는 네임벨류를 유지하려 한다면 이목대를 한옥마을의 동선 속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이안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스토리 텔링작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성계만 보기에 전주가 가지는 힘은 미약하지만 그 선대가 터 잡고 살았던 지역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그 힘은 유일무이하게 커질 수 있다. 이안사가 단지 ‘기생’ 때문에 전주를 떠났을까? 또 다른 야망이나 정치적 해석은 불가능할까, 역사학으로 풀 수 없는 시공의 단절이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오목대가 조선왕조의 모태인 것처럼 이목대 역시 그 정체성을 같이 한다. 오목대가 태조 이성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이라 한다면, 이목대는 이성계의 선대인 목조 이안사와 관련된 곳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오목대보다 의미있는 곳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00년 쓰러져 가는 조선왕조를 바라보면서 고종이 목조 이안사가 17년을 살았던 삼척에도 이목대와 똑같은 비를 세운 것을 보면, 이목대비를 도로 곁에 쳐박아 둔 듯이 방치하면 안 될 듯하다. 지금이라도 어차피 공간이 가지는 정체성을 잃었기에 길 건너 공원(오목대 남쪽 건너 구릉)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구름다리 건너 구릉 위로 올리면 어떨까? 왕조를 세운 이성계이긴 하지만 손자(이성계)를 기리는 비(오목대비)가 고조부(이안사)를 기리는 비(이목대비)를 굽어다 보고 있는 것은 어찌하든 어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