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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6 |
체육대회 교단일기
관리자(2006-06-10 10:51:31)
글 | 최준영  전주전일중학교 교사 꾸룩꾸룩 비가 내렸다. 빗방울에 씻긴 이팝나무잎 위에 수북하게 쌓인 하얀 꽃들이 싱그럽다. 일주일 전부터 날이 무더워 선생님들끼리 “체육대회하다 애들 다 쪄죽겠다”고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운동장이 질척일까봐 걱정을 한다. 그래도 비가 뚝 그치고 날이 활짝 개어서 아이들의 표정도 싱글벙글이다. 1년 중 5월은 가장 좋은 달이다. 춘계현장테마학습, 어린이날, 앞으로도 두 번이나 남은 놀토에, 쉬기로 한 스승의 날까지 노는 날이 많다. 그 중에서도 단연코 체육대회가 최고다. 방학 때처럼 할 일 없이 혼자서 심심하지도 않고, 좀 쑤시는 책상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고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다녀도 되니까 이만한 날이 없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새천년체조를 하고 800미터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우리 반 선수 녀석이 달리기 싫다고 ‘쪽팔린다’고 사라져 버렸다. 이리 저리 흩어진 아이들이 어디서 찾았는지 질질 끌고 나타났다. 잡은 놈이나 잡힌 놈이나 장난기가 가득하다. 어영부영 경기에 투입되어 뛰고 나서, 지친 기색 하나 없는 것 보면 설렁설렁 뛴 것 같다. 그 다음은 줄다리기였다. 곁에 서서 목청껏 ‘하나 둘 하나 둘’ 외치며 돌아다니는 담임이 웃긴지 자기들끼리 또 낄낄거린다. 처음 한 판은 이겼다고 기세가 당당해서 “줄다리기 우승하면 뭘 사줄 거냐?”고 물어 보더니, 내리 두 판을 지고서 코가 쑥 빠졌다. 반 전체가 모든 힘을 쏟아 부었기에, 승리하면 다른 종목보다 기쁨이 두 배가 되지만 지금처럼 예선탈락이면 낙심천만(落心千萬)이다. 스탠드에 앉아 응원을 한다고 빨간색 하얀색 수술을 들고 노래를 부른다. 여자애들은 열심히 응원하는데 체육대회 날도 교복바지를 입은 몇몇 청개구리들이 딴청이다. 여자 아이들이 붙잡아다 박수도 치고 노래도 시키며 서로 아웅다웅한다. 이쯤에서 개입할까 하다가 스스로들 자리를 잡아 갈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배시시 웃었더니, 그게 또 못마땅한 녀석들은 “선생님 얘네들 좀 혼내주세요”하며 정색을 한다. 또 웃고 말면 여자애들이 토라져 수습하기 어려워지니 화난 척하고 “뺀질거리는 녀석들은 집에 안 보낸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랬더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다. 옆 반 아이들이 간식을 먹고 있다. 그걸 마냥 보고 있다가 녀석들 “선생님! 선생님! 우리도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하며 평소 안부리던 애교를 떤다. 어제 내린 비로 선득선득한 날씨인데도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무작정 아이스크림 타령이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먹고 싶냐?”하고 물었다. 큰 소리로 대답하면 뭔가 효과가 있을 줄 알고 “네”하고 우렁찬 함성이 터진다. 그게 또 재밌어서 “돈 있으면 사먹어라”하고 싱거운 소리를 했더니 자지러진다. 한턱 쏘지 않고는 녀석들에게 오래 오래 시달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결정적 타이밍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마침 어머니들이 준비해주신 간식이 도착했다. 녀석들은 서로 먼저 먹겠다고 마구 엉켜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자리에 앉히고 하나씩 나눠주니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맛있게도 먹는다. 건수(件數) 하나하나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는 아이들 따라 내 생각도 하루에 몇 번씩 바뀐다. 나는 오후 축구 심판에 배정되어 있었다. 월드컵 때에도 잠만 자는 특이체질이라 어찌 감당할까 걱정을 했는데, 준결승까지는 페널티킥으로만 승부를 낸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규칙을 간단히 설명하고 진행을 시켰다. 우리 반도 아닌데 아이들이 골을 넣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한다. 누구를 편드는 것도 아닌데 한 명씩 공을 찰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심판인 내가 이러니 공을 차는 아이들은 더욱 조마조마할 것이다. 여섯 번의 경기 심판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우리 반 아이들은 다 흩어져 버리고 몇 녀석만 스탠드를 지키고 있다. “다 어디 갔냐?”했더니 곧 배구 예선전 시작이라 코트에 있다고 한다. 끼리끼리 앉아서 수다를 떨던 녀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경기가 시작됐다. 9명 선수들 모두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하는데,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실수 연발이다. 그러면서 분위기는 자연히 상대방을 힐난하다 점점 냉랭해졌다. “자기 자리 지키고 자세 낮추고 집중하자”고 격려하는데도 이미 무너진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하고 연속 두 판을 ‘가뿐’하게 지고 말았다. 학교 배구에서 실력차이는 네트를 넘기느냐 마느냐 인데 그걸 못하고서 투닥거린다. 응원하는 녀석들이 “내일은 뭐하고 놀래, 배구는 이기자” 한다. “뭐뭐 통과했느냐?” 물었더니 ‘축구, 농구, 줄넘기, 터치볼 등등 전 종목 예선 탈락에 남은 경기라곤 고작 계주 뿐’이라고 한다. 그래도 속은 있어서 계면쩍게 웃고 있다. 남들은 몇 종목이 준결승에 올라 신나게 응원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간식까지 즐기는 명랑운동회를 벌일 텐데, 요 녀석들 남들만 초라하게 쳐다보며 공연히 내게 엄한 투정을 부릴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체육대회에서 ‘전종목 예선탈락’이란 비극이 왕왕 있기도 하지만 당사자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다. 둘째 날이 밝았다. 스탠드 주변으로 늘어선 느티나무들이 투명한 연두빛 대신 푸른 초록빛이다. 주변의 산색이 희끗희끗한 것을 보면 아카시아가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하늘도 무심하게 우리 반으로서는 유일하게 하나 남은 종목, 400미터 계주를 먼저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뛰어 2등을 했으니, 줄다리기 3등을 한 옆 반과 비교하면 점수가 다소 우위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다시 축구 심판으로 오전을 보내고 응원석으로 돌아왔는데, 우리 반 녀석들은 철새 마냥 다른 반 경기따라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멍하니 스탠드에 앉아 있던 녀석들은 빨리 끝내달라고 어거지를 쓴다. 다른 반 구경이라도 하라고 해놓고 몇 녀석을 이끌고 마트로 갔다.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입에 하나씩 물려주면 한동안은 조용할 것이다. 따라온 녀석들은 빵가게에서 빵을 사달라고 조른다. 다른 애들에게 비밀로 하고 한 개씩 손에 들려 돌아오는 길에 “이번 달 빵구나서 큰일 났다”는 나의 엄살이 즐거운지 까르르 웃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녀석들과 많이 친해진 것 같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녀석도 있고, “난 녹차맛 싫어하는데”라고 하는 녀석까지. 한 순간도 한 가지로 반응하는 법이 없다. 철부지 녀석들의 생각 없이 마구 던지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면 나야말로 어린애 같은 선생님이 된다. 녹차맛이 싫으면 식초맛으로 생각하고 먹으라고 했더니, 애들은 “오!~ 엽기 티쳐”하고 아우성이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일정을 서둘렀기에 모든 종목을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끝냈다. 이틀 동안 햇볕 좀 쪼였다고 얼굴이 노르스름하게 그을린 녀석들 모습이 건강해 보인다. 어제는 생략했던 교실 청소를 시키며 모처럼 구석구석 털어 내고, 다음 주부터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공부 열심히 하자는 주문을 양념으로 곁들이고 체육대회를 마쳤다. 최준영 | 현재 전주전일중학교에서 한문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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