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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6 |
‘보고리’- 이문구의 「관촌수필」 중에서
관리자(2006-06-10 10:49:44)
“나 원, 재수    으면 송사리헌티 좆 물린다더니 멀쩡허니 병신 될라닝께 별 우스운 것이 다 생겨 보고리챈단 말여.” ‘장부식(不識)’, ‘늘 몰라’라는 별명이 붙은, 매사 물렁하고 심지 좋던 농투산이 신용모가  뜻밖의 봉변을 당하고 내뱉은 푸념이다. 사연인 즉, 병들어 자리보전하고 있는 친구의 아들 성문이가 제 아비 약값이나 하려고 잡아온 장끼 한 마리를 맘 좋은 신용모가 제 값이나 받고 팔아줄 요량으로 장끼를 건네받았다가 순식간에 양생조류 보호법을 어긴 죄로 경찰에 붙들리게 된다. 그리고 면식이 있는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씨알도 안 먹히고 되레 논산 훈련소에서 맛보고 십 몇 년 만에 받아 보는 대접을 받은 후에 즉결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용모의 말마따나 ‘이기면 얼굴 날리구 지면 재산 날리는 시골 재판’을 피하기 위해 잘 나가는 처삼촌에게 선이나 대보려고 나왔지만 그 또한 ‘저만 못해 보인 것에게는 문장지어 구박하고, 저보다 나아 뵈는 것들에게는 영리한 개가 되어 짖어 주는’ 위인인지라 애만 닳는 사람은 용모였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라 그런 일이 생긴 것도 ‘보고리’지만, 읍내 유지랍시고 처조카 사정 봐 주러 나온 위인이 종업원 오가는 대로 집적거리고 출입문만 삐끔 해도 흘끔거리는 허텅지거리 역시 용모에게는 ‘보고리’ 채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변머리 없는 용모는 장난도 아니고 지랄도 아닌 일로 기어이 팔자에 없는 재판을 받게 되고 인간 말종들의 집합소인 재판장에서도 코고 작은 ‘보고리’들이 난무한다. 6개월 전 한 달 기한으로 5만원 차용하고 지금까지 원금이자 이자 안 값은 놈이 반백머리 이맛전만 남기고 바짝 밀어붙인 60대 한복 늙은이더러 한다는 소리가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디 방영감 증말 이러면 맘에 안 들어요. 그런 식으로 국민총화를 저해허지 말라구요. 남의 돈 쓰고 이자 밀리기 예사고 요새 한국 재벌들 츰에는 다 그런 고비 한두 번 안 넘긴 줄 아슈.’ 허는 말짓거리도 ‘보고리, 보고리, 왕보고리’다. 길거리에서 머리 깎이기 거부하다 즉결심판에 넘어 온 철공소 직원의 ‘딴지’도 귀여운 ‘보고리’다. 5천년 역사상 우리나라에 단발령이 내린 지가 백 년이 넘는다는 것 잘 아느냐는 단속 경찰의 말에 5천년 역사 중에 4천 9백 년 동안은 세계 최고의 장발족 국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느냐고 대꾸하는 것이나, 계룡산 미신교 믿는 사람들은 단속하지 않는 이유가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는 경찰의 말에 저도 신념이 있다고 하자 그 신념이 뭐냐고 되묻는 판사의 말에 ‘미관상 필요할 것 같아서’라고 뒤통수 긁적이는 ‘보고리’도 ‘보고리’의 한 장르다.   현대 사회에 비추어 말하자면, 걱정거리 많아서 뽑아 놓았더니 되레 더 큰 걱정거리가 돼 버리는 정치가들도 ‘보고리’, 혈세로 먹고 살면서 직위 올리는 것에만 악착같은 공무원들도 ‘보고리’다. 끌어 내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고 그러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것’이 바로 ‘보고리’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고리’는 ‘어떤 일을 해결하기가 난감하게 장애가 되는 사람이나 그렇게 하는 어떤 짓거리’를 의미한다. ‘보고리’가 단독형으로 쓰일 때는 사람이나 짓을 의미하고 그렇게 하는 행위를 나타낼 때는 ‘채다’ 혹은 ‘채우다’ 동사와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보고리’가 많은 그 많은 동사 가운데 ‘채다’와 호응하는 것으로 보면 ‘보고리채다’는 ‘보채다’와 모양과 의미에 있어서 서로 닮아 있다. 하지만 ‘채우다’를 감안한다면 꼭 그것만도 아닌 듯한다. 지금으로서는 ‘보고리’의 생성과정을 단언하기는 어렵다. 어떻든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말 맛 즐기는 재미가 어찌나 쏠쏠한지 읽을 때마다 작가의 수려한 말솜씨에 탄복하게 되는 소설이다. 전라도 방언으로 밥벌이를 삼아온 필자에게 이 어휘가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거니와, 한동안 잊고 살았던 독특한 말 느낌과 기억을 일순간에 되살아나게 한 ‘보고리’와의 조우 또한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 언어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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