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6.6 |
[봉화불이 환했던 계화도]계화도는 섬이다
관리자(2006-06-10 10:49:16)
휴대전화가 없을 때 어떻게 연락을 했을까? 전화로 했겠지? 전화가 없던 옛날에는 편지를 인편으로 보냈다. 더 급한 연락사항은 말을 타고 전했고 그보다 더 급한 일은 한양에서 지방 관서로 보내는 통신수단으로 횃불을 사용하였다. 이 횃불 신호를 받아서 그 다음 지역으로 보내는 곳을 봉수(烽燧)라 하였다. 계화도 봉수대와 격포 채석강 봉화봉이 횃불로 연결이 되었었다. 조선시대부터 계화도 봉수대가 있던 산봉우리에 그 터가 있고, 봉수대 꼭대기에서 보면 새만금 방조제와 위도, 그리고 계화도 간척둑이 훤히 보인다. 40여 년 전 만해도 계화도는 섬이었다. 조수가 빠지면 육지와 연결되고 물이 차면 배가 오가던 섬이었다. 1963년 2월부터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두개의 둑을 쌓아 육지와 계화도를 연결하고 그 사이를 메워 농토를 만드는 간척산업이 시작되었다. 섬진강 다목적 댐 건설로 옥정호가 생기면서, 집과 농토를 잃은 임실, 정읍지역 수몰민 만여 명이 이주해 왔다. 계화도에 살던 어민들과 이주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간척지를 논으로 만든 후 1978년부터 쌀이 수확되기 시작했다. 그때 계화도 쌀은 찰기가 있어 밥맛이 좋은 최고의 쌀이었다. 간척공사 후 일정기간 뒤 적절하게 논의 소금기가 빠지면서 최고의 쌀이 나기 시작했다. 이 간척사업으로 섬 절반이 육지와 연결되었던 계화도는 새만금 방조제가 연결되어 이제는 바다 한점 없는 육지가 되어가고 있다. 이젠 계화도라는 지명에서 섬 도(島)자를 빼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 생합 등 조개류를 캐어 하루에 1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던 계화도 하리에 사는 43세의 황규백씨는 요즘 4~5만원의 수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은 경운기에 동네 아주머니 3-4명을 태우고 나가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있지만 앞으로는 얼마나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고 있다. 1905년 조선이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맺자, 간재 전우 선생은 1908년 “공자가 이런 시대를 당하면 바다로 떠날 것이다 하였으니 나는 바다로 가겠다”라며 위도 옆 왕등도로 들어갔다. 그 후 계화도로 옮겨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해서 그 문하생이 3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학을 했다는 사람치고 간재 제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의 마지막 성리학자였던 간재가 제자를 가르치다 생을 마감한 이곳 계화도에는 지금도 양지마을에는 계양사에 그의 위패를 모시고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적극적으로 투쟁을 하거나 자결을 하는 선비들과 달리 섬으로 들어가 제자를 가르친 부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계화도 궁안마을에는 돌 기둥위에 두 마리 새를 새겨 얹어놓은 쌍조석간이 있다. 영조 25년(1749)에 세워진 마을을 수호하는 할머니 당산이다. 할아버지 당산은 앞마을 구지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그대로 세워 만든다. 정월 초사흗날 밤 무명베 한필을 한가닥씩 잡고 잡아당기는 ‘베다라기 놀이’와  그 다음날 아침 당산 할머니 쌍조에 무명베를 감아주는 ‘할머니 당산머리 얹기’가 있다. 이런 당산제는 대개 서해안에서 유행하는 당산제였다. 돌기둥 위에 새겨 올려놓은 두 마리 새는 250여 년 동안 계화도 사람들의 소망을 신에게 전해주고, 신의 말씀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날아다니느라 오늘도 바쁘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