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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6 |
역설의 로고스, 그 서늘한 사이길
관리자(2006-06-10 10:28:16)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길 때는 그들이 격분했을 때가 아니라 그 격분을 잘 연기할 때” 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역설(paradoxe)의 성격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역설은 명백히 거리(距離)의 문제로 보인다. 배우의 연기가 자연사(自然事)에 여지없이 박진(迫眞)하면서도, 마치 오차 없이 말고삐를 잡아채는 기수처럼 그 연기를 팽팽한 기능의 인공(人工) 속에 멈추게 함으로써, 그 역설의 거리는 유지된다. 그것은 마치, (짐짓 니체와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쉼 없이 진리의 주변을 돌면서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차마 그 진리를 말하지 않으려는 태세다. 혹은 활을 당기고도 언제까지 놓지 않을 수 있는(引而不發) 그 고도의 숙련 속에서 엿보이는 역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배우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채로 분투한 것이고, 당신(관객)은 아무것도 분투하지 않으면서 느낀 것”(배우31)이다. 그리고 외줄을 타듯 이 사이 길을 오래 걷는 것, 그것이 곧 배우의 역설이다. 내가 애용하는 숙어들로 옮기면, ‘하아얀 의욕으로 그득하되 욕심은 죽은’ 서늘한 상태인 셈이다. 혹은 담대심소(膽慾大而心慾少)라 해두어도 좋다. 감성(感性)과 제 기분에 휩싸이는 짓, 가령,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오대수를 깊이 느끼면서 이입(移入)한 그 감성적 일체감이야말로 오히려 배우의 패덕이다. ‘마음으로 연기하지 말라’(배우21)는 디드로의 충고 역시 그 맥락은 동일하다. 변덕스런 느낌에 휘둘리는 배우로부터는 통일성과 일관성이라는 기능적 충실도를 기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훌륭한 배우라면 오히려 견실한 판단력, 그리고 냉정하고 침착한 관찰력이 요구(배우19)될 뿐이다. “감성적 인간은 자연의 충동에 복종하고 심장의 외침소리만을 낼 수 있을 뿐”이지만 “위대한 배우는 현상을 관찰”(배우65)하기 때문이다. 무어(G.E. Moore)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주의적 오류(the naturalistic fallacy)’를 피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배우의 몫이다. 연기는 자연 그 자체에 진정성이 있는 게 아니라, (마치 ‘기술의 자연화’라는 칸트의 개념이 시사하듯) 이를테면 인공의 자연화라는 근진도(近眞度)의 긴장 속에 있다: “(배우의 연기는) 순전히 모방이며, 반복 학습되는 교훈이자 엄숙한 위장이고, 배우가 연구한 뒤에 오랫동안 간직하는 기억의 탁월한 모방입니다.”(배우30) 그래서 디드로의 연기론은 기능주의적이다. 이상적인 모델을 상정하고, 이것을 제대로 모방할 줄 아는 ‘기능’ 속에 배우의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환영을 상상해내고 그 천재를 본뜰 줄 아는 재능”(배우77) 속에 연기가 있지, 문외한들이 쉽게 쏠리곤 하는 ‘영혼’과 ‘감동’들로서는 독백 한두 마디 이상의 일관성을 보일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러므로 “기능에 충실”(배우91)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배우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미덕이며, 요컨대 이것은 “차가운 머리와 깊은 판단력과 섬세한 취향과 각고의 연구와 오랜 경험과 보기 드문 기억력의 작업인 것”(배우117)이다. 역설의 이치는, 내가 오랫동안 애용해온 숙어를 빌면, ‘역설(力說)-역설(逆說)’ 사이의 상호되먹임 장치와 같다. 디드로의 연기론에 따르면, 좋은 연기의 요체는 역설(力說)의 파토스가 아니다; 그것은 그 파토스를 몸으로 제어할 수 있는 역설(逆說)의 로고스, 그 서늘한 사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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