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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6 |
제 7회 전주국제영화제 감상법
관리자(2006-06-10 10:26:40)
잔치 첫날, <오프사이드> 선택의 고통. 으리으리한 빵집에 가면 기껏 단팥 든 것만 고른다. 해서 관성의 나를 배반하기로 한다. 여섯 번 영화제 경험이 준 초이스의 원칙 그 첫째, 18세에 속지 말 것. 둘째, 실험적인 영화에 기대지 말 것 등 나름대로 원칙을 정하고 섹션과 시간표를 거의 외우는 단계에 들어갔다. 맨날 말로만 ‘언제 밥 한 번, 언제 술 한 잔’ 하자던 친구들을 위해 10만원 어치 티켓을 끊다. 일단 극장에 개봉될 가능성이 드문 영화로 고르는데 소비에트 영화가 최고 요리일 듯. 회(膾)와 자(炙) 그리고 나물과 국을 고루 골라본다.     월드컵의 해라고 첫 요리는 <오프사이드>. 이란의 축구장은 금녀 구역. 경기가 보고 싶은 열혈 소녀들은 스타디움에 들어갔으나 남장이 금세 탄로나고 만다. 그 다음은 상투적. 감독 파나히는 ‘우리 여자들도 당신과 다르지 않다.’ 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내 감정을 들켰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에 묻는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지? 패스만 있지 드리블이나 페인팅이 약하다. 작년 개막작보다는 나았지만 이란은 항상 어린애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 나를 감전시키던 고압 전류의 <거북이도 난다>를 뛰어넘지 못한다.    문화유산, <장례식> 지혜로운 자 장례식에 가고 어리석은 자 잔치집에 간다던가. 제목은 무거웠지만 일찍이 없던 영화였고 다시 만들 수 없을 성찬이라는 생각에 배가 불렀다. ‘말은 발로 빛나고 시인은 말로 빛난다’, ‘진실은 언제나 주린 배에서 나온다’, ‘노래 가사가 길다고, 말의 갈기가 멋있다고 자랑하지 말라’ 웬만한 대사가 모두 시였다. 알아보니 <장례식>은 19세기 카자흐스탄의 이름난 시인 아칸 세리의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단다. 그 시를 읊어대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주류가 광대뼈와 째진 눈을 가진 우리와 같이 생긴 사람들이라는 점이 더 끌렸다. 불랏 만수로프는 대가란다. 1876년, 카자흐스탄의 평원. ‘내 죽거든 나의 친구들을 모두 불러 말을 잡아 배불리 먹게 하라’, ‘배고프고 집 없는 사람을 잘 다스리라’는 유언을 남긴 족장 바이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대초원에서 펼쳐지는 경마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가장 큰 의식. 시작부터 힘이 넘친다. 숨을 죽이게 하는 영화, 색깔이 있고 악기가 있는 영화, 스케일과 민속이 있는 서사시였다. 소수민족이 억압자 밑에서 자유를 잃고 고통당하는 카자흐스탄 민중의 슬픈 역사를 담았으니 16년을 창고에서 썩을 밖에. 누가 함부로 영화를 상품이라 짖는가. 임안자 선생의 부연설명을 들었는데 그 쪽 동네 사람들의 갈등 해결에는 음악으로 전투를 대신하기도 한단다. 선생의 프로그래밍에 존경을 보낸다. 이제 이 지상에는 이런 아름다움이 없을 것이기에 기회가 있다면 시인 직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식 관람할 영화. 추억 여행, <게터웨이> 고맙기도 하여라. ‘폭력의 피카소’ 샘 페킨파의 영화를 영화제서 다시 보다니. 치밀한 범죄 계획, 은행털이, 지저분한 악당과 경찰을 처리하는 매끄러운 때로는 거친 솜씨,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고 멕시코로의 멋진 탈출, 그때는 모든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70년대 친구들을 불러 CGV에서 삼십년 전 영화를 다시 보다. 스티브 맥퀸은 갔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이기에. 그 때 그랬다. 대학에 가면 막 깍은 연필처럼 훤칠한 키, 햇볕을 끌어당기던 긴 생머리의 <러브 스토리>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우를 만날 거란 환상을 가졌었다. 그 사랑스러운 여자가 갱스터라니. 권총을 갈기면서 평정심을 잃지 않는 폭력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스티브 맥퀸과 알리 맥그로우는 실제 결혼했었지, 후후.   지독한 검열로 잘려나간 부분을 본다는 즐거움 말고도 20세기에 두고 온 여인을 만난다는 재회의 감격이 더 컸을 것이다. 폭력적(정말 우아했었다)이고 남성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화면은 선악의 구분이 멀었고 관객에게 철저히 복무하는 재미있는 영화였다.(결말부의 탈출 성공이 ‘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탈출 후 압송되었다는 자막이 추가되었다는 어이없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어라, 슬립만 걸친 생머리 여신의 죽여주던 모습이 이리 평범할 수 있나?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오로지 알리 맥그로우를 보러 갔는데 21세기의 눈으로는 역시 스타는 스티브 맥퀸이었다. 지친 듯한 눈길의 맥퀸이 뿜어내는 카리스마와 더불어 페킨파의 손으로 빚어내는 꼴통 마초들의 스타일리시한 폭력장면들은 저녁의 맥주를 더 맛있게 했다. 우리 셋은 사람 더 살아봐야 한다면서 옛날을 이야기 했다.   마르케스의 자식, <모래의 집> 1910년, 황량하기만 한 모래 평원, 젊은 여인이 엄마와 함께 남편을 따라 사막 한 가운데에 정착한다. 독재자 남편의 죽음과 뱃속 아기와 함께 갈라파고스 같은 곳에 버려진 어미와 딸은 당분간 이 모래언덕에 지은 집에 머물기로 한다. 모래가 된 여인과 모래가 될 여인이 사는 집 한 채. 기둥과 벽 창 그리고 지붕에는 빛이 닿고 또 반대쪽은 그림자는 지지만 녹이 슬지 않는다. 다만 바람과 모래에 천천히 묻혀갈 뿐. 딸 마리아가 태어난 지 10년, 오레아는 어렵사리 사막 마을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기회를 잡지만 계속되는 탈출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엄마는 모랫속에서 화석이 되고 세밀하고 복잡한 감정을 가진 여인은 모래처럼 단순해진다. 어떠한 생산양식의 변화도 없는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겨우 살아남았을 때, 그녀에게 찾아오는 제일 큰 적은 외로움. 그녀는 모래언덕과 세상이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지독한 고립이란 것을 알고서 등잔을 켜고 빨래줄에 옷을 걸고 생선을 굽는다. 행동의 복잡성이 사라지자 그녀는 남자를 찾는다. 흑인 노예출신. 위악적 자해를 일삼는 마리아가 자신을 표현할 능력은 몸뿐. 바깥세상으로 떠났던 딸 마리아가 돌아와, 인간이 달에 갔는데 그 곳에는 모래밖에 없다고 전하는 마지막 장면은 남미의 정신 마르케스에 이르게 한다. 시간의 켜에 따라 부피가 변화하는 모래언덕의 질감을 잘 잡아낸 롱 쇼트 중심의 촬영, 모래언덕이나 바닷가 장면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변이를 만들어내는 편집, 60년에 걸친 두 여인의 내면의식의 변화를 잘 표현한 연기도 수준급. 하나 더, 감독 웨딩턴이라는 이 브라질 친구가 1970년산이라는데 나는 절망한다.    신 전주 8경 나도 ‘더 샵’에 살고 싶다.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뻐꾸기가 우는 운암 호수 주변에 작업실을 갖고 싶으나 턱없는 말씀. 그래도 서신동 롯데 가서 영화도 보고 지하에서 회전초밥을 먹을 정도는 된다. 거기 백화점을 나오다가 본 사람 많으리라. ‘미래에셋의 눈으로 성장하는 인도를 발견하라’는 커다란 현수막을. 빚도 많은데 펀드는 그렇고 이참에 <비르와 자라>를 통해서 나름대로 메가박스에서 인도를 발견했다. 롯데서 만난 사람 이마트서 만나면 짜증스럽지만 CGV에서 본 사람 메가박스에서 다시 만나면 반가운 것이 영화제 아닌가. 전주팔경이 무언지는 까먹었다. 선미촌 색주가의 황혼이 오는 모습을 하나 넣고 싶지만 실없는 소릴 것이고, 영화제 레드카핏에 서는 스타와 환호하는 사람들을 집어넣는 건 어떤가. 하나 더 넣으라고? 막걸리집 풍경은? 영화 평론가 세 분 모시고 홍도주막엘 갔다. 새로운 행성이나 발견한 듯한 서울촌놈들의 표정이라니. 영화제가 일곱 번에 이르도록 여길 안 데려왔냐고 호들갑을 떨어서 경원동 가맥 몇 집도 소개시켜주었다. 음, 얼마 전 <사생결단>을 보았다. 거칠지만 좋았다. 오롯이 부산이 담아진 영화. 그런데 말이다. 전주가 영화 촬영의 메카라 하는데 전주의 구석구석이 담긴 영화는 아직 없다. 더 기다려야 하나?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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