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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6 |
각시붓 들어 써내려갈 시인
관리자(2006-06-10 10:25:21)
글 | 박남준 문화저널 편집위원 살아서 마지막쯤에 꾹꾹 숨 가쁜 목숨으로 눌러썼을 <이사>라는 시처럼 꼭 그렇게 살다간 시인 박영근을 생각하며 여기 몇 자 적는다. 시인 박영근을 처음 대면한 무렵이 그러니까 80년대 중반 내가 전주 기린봉 산자락, 중노송동 1가 9-1이란 주소를 가지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때 전라북도 민주화운동 협의회라는 곳에 한달 활동비 5만원(그것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건너뛰기가 다반사였지만)을 받고 월 5,000원의 방세와 전기세, 연탄 값과 쌀값과 자전거 수리비와 담배 값과 빈소주병을 모아 구멍가게에 가서 무궁화표 빨래비누와 바꾸던 그런그런 짜잔한 일들과 함께 독재의 종말과 변혁을 꿈꾸기도 하던 나날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성급하게도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배엽이와 시인 백학기와 소설가 이병천과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던가 첫 상면의 술자리, 곤드레가 된 영근이가 울고불고 몸부림치다가 붉은 피 낭자해지던 그 파장의 술판, 산비탈 두 사람이 누우면 안성맞춤의 관 짝 같은 내 방에 업히고 끌려와 그 지독한 냄새의 양발로 함께 쓰러져 누웠던 옛날이 떠오른다. 울음이라면 나도 어디 내놔도 빠지질 않는 한 울음 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비교적 자리를 가려서 우는 편이라면 영근이는 모든 상황과 장소를 불문하고 막무가내로 우는 그야말로 대책이 서질 않는 사람이었다. 더러는 그런 술버릇을 가진 영근이와의 술자리를 피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도 한동안 영근이의 눈을 피해 따로 술자리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울음 외에 또 영근이를 추억하게 하는 것 중에 그의 가열찬 독서력이다. 특히 시집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읽고 있던 던 시가 마음에 들면 그때부터 열일을 제치고 술을 마시며 꼭두새벽까지 그 시를 보고 또 소리 내어 읽고 난 후면 어김없이 전화를 하고는 했다. 이따금 새벽이 아니라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인 밤 시간에 혹여 영근이의 전화를 받는 사람은 빈말이라도 “보고 싶다. 한번 놀러와” 이런 말을 던지는 것은 그가 사는 인천이 아닌 전라도에서건 강원도나 충청도, 경상도에서건 절대로 금기사항이었다. 왜냐하면 전화를 끊은 영근이는 곧장 택시를 불러 잡고 그곳을 향하여 달려오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술을 마시면 언제부터인가 알 수없는 암호처럼 주억거리고는 했다. "한 밤중에~" 노래는 처음부터 밑도 끝도 없이 다만 "한 밤중에~" 그리고는 훌쩍거리며 울음보를 터트렸다. 한 밤중에? 그래 그 다음이 뭐야 뭐냐고 시인 박영근이 죽었다. 그의 관을 뒤따르며 오르던 산길, 길가에 애기똥풀 졸방제비꽃 지천으로 피고 꾀꼬리와 흰배지빠귀와 검은등 뻐꾸기 새소리들, 공장지대의 취업공고판과 네온사인과 기계들의, 차량들의 소음을 너는 죽어서야 벗어나는구나. 그가 세상을 떠나고 아직 잔디도 덮지 않은 무덤에 소주 잔 붓고 돌아온 며칠 나는 눈이 아파서 꽁꽁 집에 박혀있었다. 시인 박영근, 살아서는 널 무슨 꽃에 비겨볼 생각 전혀 해보지 않았는데 각시붓꽃 같다 여겨진다. 나무그늘, 숲 덤불 속에서도 빛나는 키 작은 꽃, 네 무덤가에 풀이 우거지고 언젠가는 각시붓꽃도 피어나리라. 세상에 시인이라는 것 정말이지 몹쓸 것이지. 영양실조와 결핵과 폐렴으로 인한 폐혈증이 사인이라니, 그래 정말이지 시인답구나. 오월, 어쩌면 꽃들은 이렇게도 피어나는데 그러니까 너는 네 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구나 그래서 그렇게 막무가네로 날 인천의 네 집에 끌고 갔던 것이구나. 마당도 없는 길가 집, 벽면을 가득 메운 책을 빼고는 방 한쪽에 싱크대와 책상과 낡은 컴퓨터와 의자 하나, 손바닥만한 밥상이 살림의 전부였던 영근이와 해물탕을 끓여 술잔을 나누던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 중노송동 1가 9-1, 내가 전주기린봉산자락에 살 때 그때 아침밥상을 차렸던가 기억나지 않는구나. 널 위해 밥상 한번 차려주고 싶었는데 채마밭에 상추와 열무와 고추와 부추, 이 비에 부쩍부쩍 자라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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